26.4.16(木)
"경주, 금오산(金鰲山) 부석(浮石) 바위를 품고"
경주 남산은 늘 그 자리에 있습니다. 다만, 그 자리를 걸어가는 사람만 바뀔 뿐입니다. 오늘은 산악인이자 기행작가이신 진희영선생님과 함께 경주 금오산 (金鰲山)을 색 다른 코스로 다녀왔습니다. 다섯 달 만의 재회(再會)였습니다. 남산은 마치 천 년을 기다렸다는 듯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습니다. 경주 화랑교육원을 지나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 공영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돌탑은 하산 후 돌아보았습니다. 삼층석탑은 그 침묵이야 말로 신라가 남겨둔 가장 큰 목소리입니다. 남산동네 회관을 지나 신장로(新作路)처럼 이어진 길을 밟으며 오르니 4월의 신록은 이미 여름의 문턱에 서 있었습니다.
남산은 산이 아니라 거대한 불국(佛國)입니다. 불국사가 절이라면 남산은 그 절을 둘러싼 하늘과도 같습니다. 선생님의 해설(解說)은 단순한 설명을 우문현답처럼 남산을 수 없이 오르내리면서 흔적(痕跡)을 남기고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 그 명칭과 산행 해설이 담긴 것에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역사기행순례를 온 듯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신라 천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길잡이였습니다. 돌 하나, 탑 하나, 바위 하나마다 불교의 숨결이 스며 있고 그 길은 과거 언양(彦陽)으로 이어지던 지름길 질러 능선을 오르는 길이 사람들의 삶의 길이인 듯합니다. 신작로 같은 트레킹을 하는데 작은 도랑을 건너 험로로 15분쯤 올랐을까. 형체조차 희미한 마애불 하나를 만났습니다. 이름도, 기록도 분명치 않지만 그 앞에 서면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누군가는 간절(懇切)했다”는 것을 신라인들의 언양과 양산 등 보부상(褓負商)들이 이 능선을 나서기 전 이곳에서 안전을 기원하는 삼배를 올렸다는 추정해 봅니다. 당시 삶이 남긴 흔적입니다.
이곳을 지날때는 10명이 모여야 1개의 조 단위가 형성되면 출발을 할 만큼 서로와 서로를 힘을 합해서 올랐다는 전설도 설명하길래 귀가 솔깃했습니다. 즉 말에 산적(山賊)들이 아니었나 짐작을 합니다. 산적하니 울산 방어진사람들이 시내 시장을 가기 위해 남목고개를 넘어갈 때 산적이 있었다는 증언을 직접 들은 봐도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 앞에서 조용히 허리를 숙였습니다. 남산의 계곡이 63개 , 봉우리는 180여 개 이 숫자는 통계가 아니지만 신라 사람들의 기도 횟수와도 같습니다. 포석정의 물길, 배동의 석불입상, 칠불암의 마애불까지... 이 산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신라 흥망(興亡)을 통째로 품은 돌의 기록입니다. 1968년 국립공원지정,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그래서 남산은 손을 대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도착한 금오산 金鰲山 金鰲, 황금 금(金), 자라 오(鰲) 자라가 천년을 살 듯 이 산의 기운도 천년만년 이어지라는 뜻 풍수는 믿음이지만 남산에 서면 그 믿음이 괜히 생겨납니다. 경주남산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타원형으로 이루어졌으며, 금거북이가 서라벌 깊숙이 들어와 편하게 앉아 있는 형상이라고 합니다. “이 땅이 왜 경주였는지” 바람이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하산길 바위마다 새겨진 불상들 그리고 병든 채 쓰러져가는 소나무 천 년을 버텨온 산도 결국은 시간을 이기지 못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모습이 왠지 사람과 닮았습니다. 오늘 산행은 단순한 등산을 넘어 역사기행을 함께 보고 배우는 기회였습니다. 돌을 보고 역사를 듣고 그 사이에서 내 삶을 비춰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남산은 말합니다. “나는 천 년을 버텼다. 너는 오늘을 어떻게 살겠느냐.” 그래서 우리는 또다시 이 길을 찾게 됩니다. 추후(追後) 가끔씩 함께 시간이 허락된다면 경주남산의 분야별로 또 함께 합시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