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14토15:00
特別企劃展 "묵향에 취하다"
"墨香에 취하다" 2월 중순, 울산신문에서 특별기획전 열린다는 소식을 읽었다. '꼭 한 번 가봐야지.’ 마음속에 그렇게 적어 두고서야 오늘에야 비로소 길을 나섰다. 봄기운이 살짝 번지기 시작한 토요일, 언양 화장산 아래 조용히 자리한 오영수문학관을 찾았다. 주말인데도 문학관은 차분했다. 주차장에 들어서니 마침 한 자리가 비어 있어 차를 세우고, 옷깃을 여미며 의관(衣冠)을 가다듬었다. 문학관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오래된 서재에 발을 들여놓는 듯 마음이 절로 고요해졌다.
해설사께서는 나를 알아보는 듯 눈인사를 건넸고, 나 역시 반가움으로 고개를 숙였다. 2층에서는 인문학 강좌가 열리고 있었다. 수필과 시, 소설을 주제로 한 1년 과정의 강의라는데, 강의실은 수강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날의 주제 역시 전시와 같은 이름, “오영수, 묵향에 취하다”였다. 이미 나는 오영수 선생의 글을 사랑하는 독자(讀者)이자 그의 펜 끝을 따르는 사람이라, 전시 일정도 미리 스크랩해 두었었다. 그러나 지난번 천전리 암각화를 찾느라 기회를 놓쳤고, 오늘에서야 그 약속을 지키게 된 셈이다. 전시장에는 선생이 생전에 남긴 유묵들이 처음으로 공개되어 있었다. 울산 울주군 웅촌면 곡천리, 자택 글방 침죽재에서 남긴 글씨들이라 한다. 어쩌면 생의 말년, 산과 강을 바라보며 써 내려간 마지막 마음일지도 모른다.
‘산심강정(山深江靜) 산은 깊고 강은 고요하다.
허심(虛心) 마음을 비워라.
거욕무사(去慾無邪) 욕심을 버리면 사악함도 사라진다.’
짧은 글귀들이지만 그 속에는 세월을 건너온 한 문인의 인생이 담겨 있었다. 자연 속에 스스로를 묻고, 마음을 덜어내며 살아온 선비의 숨결이 묵향처럼 잔잔히 번져왔다. 이 유묵(遺墨)들은 선생이 동료 문인이나 친지들에게 써 주었던 글이라고 한다. 자연을 바라보며 얻은 사색, 그리고 삶을 향한 담담한 태도가 단정한 필체 속에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역사학자 송수환 박사는 “난계의 유묵은 어린 시절 서당에서 익힌 서법의 연장선에 있으며 단아한 선비의 품격을 갖춘 글씨”라고 평했다. 전시장을 둘러보다 문득 선생의 출생 연도를 보았다. 1909년 그 순간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우리 선친과 같은 해에 태어난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이 이곳에 남아 있는 듯했다.
문학관 한편에는 박노해, 김지하, 유홍준, 양성우 선생의 시집도 놓여 있었다. 책등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또 다른 공부가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문학관도 예전보다 많이 달라져 있었고, 세월 속에서도 문학의 향기는 더 깊어져 가는 듯했다. 선생은 문학지 현대문학 창간에도 힘을 보태고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한국 문단의 한 축을 이루셨다. 그 문학의 길이 바로 이곳 울산의 산자락으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마음을 울렸다. 문학관을 나오며 잠시 화장산 쪽을 바라보았다. 시간만 조금 더 있었다면 선생의 묘소에 들러 조용히 술 한 잔 올리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마음속으로만 인사를 건넸다.
“선생님, 오늘 묵향 잘 맡고 갑니다. 다음에 다시 찾아와 잔 한 잔 올리겠습니다.” ㅎㅎ
봄 햇살이 문학관 마당에 잔잔히 내려앉고 있었다. 나는 그 묵향의 여운을 가슴에 담은 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현대문학의 초석이 된 吳永壽編輯長님 편안하게 쉬세요 ^^















창간 당시 주간은 조연현(趙演鉉), 편집장은 오영수(吳永壽)였으며, 이 후 김윤성(金潤成)·윤재근(尹在根)·신동욱(申東旭)·감태준(甘泰俊)·최동호(崔東鎬) 등의 주간과 김수명(金洙鳴)·김국태(金國泰)·감태준 등의 편집장을 거쳤다. 1988년 ‘주식회사 현대문학’으로 발족된 이래 1999년 현재 발행인은 황태랑이고, 편집인·주간은 양숙진이다. 창간 당시 ‘문화의 핵심은 문학’이라는 취지 아래 ‘한국 현대문학의 건설’을 목표로 하고, ‘고전의 정당한 계승과 그것의 현대적인 지양’을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삼았다.
순수문예지로서 시·소설·희곡·수필·평론의 문학 전반에 걸친 창작 작품들을 주로 게재하고 있으며, 고전문학 및 외국의 현대문학, 현대사상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1955년 현대문학상(現代文學賞)을 제정하여 1999년 현재 시·소설·희곡·평론의 4개 부문에 제44회 수상자를 선정하였고, 신인추천제도를 통하여 우수한 신인을 문단에 배출시키고 있다. 1967년 제1회 장편소설공모 이후 5회의 공모가 있었고, 1994년 제1회 ‘새로운 작가상(作家賞)’을 제정하여 장편소설을 공모하였다.
1971년 문인극회를 창설하여 3회의 공연을 실시한 바 있고, 전국 순회 문예강연이나 문예창작 실기강좌, 시 낭송의 밤, 그리고 문예대학 등을 개최하여 문학 인구의 저변 확대에도 노력을 기울여왔다. 1971년 7월 시 전문지 ≪시문학 詩文學≫을 창간하였으나 1973년 5월≪시문학≫지는 통권 23호로 도서출판 성문각(成文閣)에 넘겨주었다. 1982년 12월부터 가로쓰기를 단행하였고, 1983년 5월 출판부를 신설하여 단행본의 출간을 시작하였으며, 1993년 7월 판형을 국판에서 신국판으로 변경하였다.
서울시문화상(1965), 문화공보부장관 공로감사패(1967), 한국잡지협회상 경영 부문(1967), 한국잡지협회상 편집 부문(1968)을 수상하였고, 공보처 주간 우수잡지(1994)에 선정되었다. 통권 500호의 출신문인 명단에 의하면, 시 분야에 309명, 소설 분야에 122명, 평론 분야에 70명, 희곡 분야에 9명, 수필 분야에 26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대표 작가로는 김관식(金冠植)·박재삼(朴在森)·오유권(吳有權)·이범선(李範宣)·정창범(鄭昌範)·홍사중(洪思重)·문덕수(文德守)·최일남(崔一男)·박경리(朴景利)·서기원(徐基源)·한말숙(韓末淑)·이문희(李文熙)·윤병로(尹炳魯)·김우종(金宇鍾)·이제하(李祭夏)·황동규(黃東奎)·고은(高銀)·손장순(孫章純)·민영(閔暎)·천승세(千勝世)·성춘복(成春福)·마종기(馬鍾基)·신동욱(申東旭)·김윤식(金允植)·허영자(許英子)·이성부(李盛夫)·이승훈(李昇薰)·문병란(文炳蘭)·정을병(鄭乙炳)·정현종(鄭玄宗)·이문구(李文求)·오세영(吳世榮)·오규원(吳圭原)·김채원(金采原)·고형렬(高炯烈)·현길언(玄吉彦)·이동하(李東夏) 등을 꼽을 수 있다.



현대문학은 1955년 현대문학사에서 시, 소설 희곡, 수필 평론 문락전반에 걸처 창작활동을 해온 공간 문학잡지 추사김정희선생의 제가 쓴 '김환기' 선생님 호, 수화( 樹話) 쓴 글이랍니다. 굵고 단순하며 안정적이며 힘이 있는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 최장수 문예지로 1955년 1월에 창간되어 결간(缺刊) 없이 1999년 12월 현재 통권 540호의 지령을 기록하고 있다.

오영수의 '요람기(搖籃期)'를 읽고 (중1 국어교과서수록)
오늘따라 유난히도 가을빛 하늘이 에머럴드 빛으로 파랗다.가을이지만 한낮의 태양은 여전히 따갑고, 간간이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그나마도 땀내나는 목젖을 식혀주는..., 그렇게도 검게 보이는 바닷가를 다녀와 다시금 컴~앞에 앉았다.
찬바람 몰아치는 바다내음을 삼키며 옷깃을 여미었던 지난 여름의 그 바다와는 달리,
오늘보는 바다의 모습은 잔뜩 화를 머금고 있는 듯 느낌마저도 고약하다.
처얼썩~~~~!
몹시도 화가난 듯한 바다..., 뽀오얀 파도가 물보라를 일으켜 인접한 해변의 바위를 때린다.
저토록 힘차게 내려치다보면 멀잖아 저 바위들도 시퍼렇게 멍이 들겠지...?
아니...., 바위가 멍들기 전에...., 버얼써 바닷물이 시퍼렇게 멍이들어 버렸다.
비록 멍든 바다지만 나에게 있어 이 바다라는 존재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내 어릴적 고향은 바다와는 거리가 멀어 버스타고 30분..., 지게지고 한 시간...,
토끼길 같은 오솔길을 따라 또다시 한 시간이나 가야하는...,
골골이 박힌 산능성이를 지나야 겨우 초가삼간 두어채 보이는 내륙이었기에...,
자주 보지 못하는 이 바다를 나는 유난히도 어릴 때부터 좋아했었다.
그랬던 나였기에..., 오늘도 역시 뒤늦게 찾아온 가을의 열기를 식히려 이 바다를 찾았지만
그래도 난 잔뜩 화를 머금은 이 바다가 좋다.
이 순간 왠지..., 바다를 좋아했던 내 어릴적 고향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래서인가...? 오늘도 역시 옛 추억을 찾으려는 애뜻한 마음을 담아...,
낭만어린 고향의 향수를 찾을 수 있는 한 권의 책을 소개할까 한다.
부족한 이 사람의 글방을 찾는 님들이
잠시나마 조용히 상념에 잠길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다면 더이상 바램이 없겠다.
이토록 해맑은 날에..., 컴퓨터 앞에 앉아 멍청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같은 바보(?)가 있다는 것이 몹시도 짜증스럽기 도 하지만...,
그래도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상큼한 가을이란 계절을 벗 삼을 수 있는
좋은 책 한 권이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여가선용이 어디 있으랴.
50대 후반이 되어....!!!
직장 문제, 삶의 문제 등으로 바쁘게 움직이다보니 한동안 책을 가까이 하지 못하다가
'원초적인 혼돈과 무질서의 도시(????)'라고 스스로 판단해 온
이 부산이란 땅에 정착한지 어느덧 십 수년...!
아무런 생각없이 우연히 들린 00도서관 책꽂이의 한 쪽 구석에 꽂힌 이 책
'요람기(搖籃期)'를 찾아 읽고 어릴 적 내 고향의 사계(四季)를 더듬어 본다.
정말이지 요즈음과 같이 복잡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이 책은 어릴 적 고향의 정취와 풋 내음 나는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하고,
어머님 품 속 같은 포근한 향수(鄕愁)를 보듬을 수 있는 행복을 만끽하리라 확신한다.
작가 오영수(1919∼1979)」는 주로 한국적인 소박함을 기조로
애정을 가지고 작품활동을 펼친 전형적인 단편작가로서
각박한 현실을 온화한 인정의 입김으로 되살려내어 삶의 온갖 모습에 애정을 갖게 하며,
친근하고도 맑은 문체와 서정적인 흥취, 그리고 소시민적인 따뜻한 정감이
작품세계의 특색을 이룬다.
이따끔 그는 현실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환상에 사로잡힌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일부 작품들에서 날카로운 현실비판을 느낄 수 있으며, 때로는 증언의 형식으로,
때로는 폭로나 풍자의 형식으로 철저한 통찰의 폭을 표현해 주었다.
주요작품으로 '머루, 갯마을, 박학도, 비오리, 후조, 수련' 등의 단편소설이 있다.
산간마을 어린이들의 소박한 생활이 추억의 형식으로 그려져 있는 '요람기(搖籃期)'는
글을 읽는 이에게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 거의 수필에 가까운 분위기를 준다.
기차도 전기도 없고, 라디오나 영화도 모르는 산골 시골마을 아이들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 맑고 깨끗하게 그려내고 있다.
글의 시작은 먼 산골짜기의 눈이 녹아 내리기 시작하는 봄에서부터
아이들의 일상적인 놀이생활을 작은 사건의 단면으로 그려내고 있다.
까마귀 고기를 먹으면 '끼루룩'하고 뛰게 된다는 동네 나이 많은 머슴에게 속아 도망가던 일,
여름 한 낮에 그늘진 평상에 누워 왕매미는 '지이지이', 참 매미는 '맴맴 맴매애',
쓰르라미는'새애릉새애릉', '시옷시옷' 울던 무당매미, '맴맴맴 맴부랑'울던 이름 모를 매미의
울음소리를 듣는 아이..., 콩이 익으면 콩가지 꺾어서 콩서리 해 먹으며 놀던 모습도 그려져 있다.
이럴 때도 동네 머슴이 나타나 아이들이 콩을 못먹게 아이들은 '범버꿍 범버꿍'하며 먹게 하고
자신은 '냠냠'하며 먹어도 그저 '범버꿍' 소리에 즐거워하는 아이들..., 겨울이 되어
연날리기를 하다 정월 보름날 가지고 놀던 연을 하늘 멀리 날려보내면서 이야기의 끝을 맺는다.
책을 읽으면서 머리 속에는 내 어린 시절, 부모님들이 살아 오셨던 낙동강 강줄기의
은빛물결 반짝이는 모습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몇년 전에 작고하신 「황순원」 작가의 단편소설 '소나기'와 거의 같은 맥락의 느낌을 받게 하는
작품이었다.
「김초시네 」머슴과 아이들의 장난에서
머슴의 짖궂음과 아이들의 순진함을 상대적으로 느낄 수 있다.
'너구리 사냥', '까마귀 구이', '소몰이', '수박 참외 서리', '매미 소리', '먹어보지 못한 별똥별',
'콩서리' 등, 언젠가 어린 시절 한 때, 한 번쯤은 경험해 보았던 숱한 일들이 새삼스럽게
애틋한 추억이되어 쏘옥쏘옥 고갤 내민다.
찔레꽃이 필 때쯤이면 아쉬움과 애상에 젖어들게 하는..., 지금은 어느 하늘아래
어느 땅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첫 사랑 '옥이'와의 이상야릇한 감정에서는
'소나기'에서의 소년 소녀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마지막 대목에서 연을 날려보내는 소년이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소망과 꿈을 이야기한다.
'언제나 가보고 싶으면서도 가보지 못하는 산과 강과 마을, 어쩌면 무지개가 산다는 늪,
이빨없는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며 산다는 산 속, 집채보다 더 큰 고래가 헤엄치며 다닌다는 바다,
별똥별이 떨어져 내리는 어디쯤...,' 어린 시절 동화를 읽으면서 꿈꿔왔던 그런 많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불혹(不惑)을 후울쩍 넘기고 지천명에 다다른 나이이고 보니
이러한 아름다운 추억들을 벌써 모두다 잊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옛날에 대한 기억은 사람의 감성을 풍부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바쁘게 돌고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그 상황을 벗어나 멀리 떠나가는 연처럼 생각만이라도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수년의 세월을 함께 해 온 직장 동료들.., 그리고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소꿉친구와 어렴풋
기억의 끝으로 잊혀져 가는 옛 친구들의 이름들이 기억났다가는 살아지고 또 다시 떠오른다.
고향의 뒷동산이 아련히 생각나는 지금,
왠지 오늘따라 내 고향 죽마고우(竹馬故友)들의 향취가 그리워 진다.
9월의 마지막 주말인 오늘...,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에 젖는 이 소중한 순간에 마음과는 달리
자주 찾아보지 못했던 꿈에도 그리던 고향을 찾아 고향어른들과 친지들에게
바쁘다는 핑계로 지금껏 찾아보지 못한 인간의 도리를 다하고 먼 세월의 기억 속에 묻힌
소꿉친구들과의 추억을 반추하고 싶다.
가을이 더더욱 성숙해가는 듯한 오늘..., 수확과 결실의 계절을 살아가는
모든 님들의 염원을 담아 추억 속에 묻힌 동심을 찾아보았다.
이 아름다운 계절, 9월을 맞아 우리 고운 님들이여~~~!
오늘도..., 내일도..., 언제나 행복하소서~~~!

1926년 언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 무렵, 학교장의 추천으로 우체국의 견습공으로 취직해 잠시 근무했다. 1932년 일본 오사카(대판, 大阪)의 나니와 중학 교 속성과를 수료했다. 1935년 일본대학 전문부에 적을 두었으나 '부친별세'의 거짓 전보를 받고 급히 귀국했다. 오영수는 교사인 김정선(金貞善)과 결혼했다. 1938년 장녀 숙희가 태어났다. 1939년 오영수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국민예술원을 졸업했다. 1940년 차녀 국이 태어났으나 2년 뒤에 사망했다. 1943년 일본에서 돌아와 양산군 일광면 화전리로 이사했다. 그 곳에서 김범부 선생을 만나 그의 동생 동리를 앓게 됐다. 장남 철이 태어났다. 1944년 부친이 타계했다. 1945년 8월15일 광복 후 경남여고에서 미술교사로 교편생활을 시작했다. 1946년 차남 윤(潤)이 태어났다. 1947년 장남 철이 사망하고, 1948년 삼남 건이 태어났다.
1949년 단편소설 '남이와 엿장수'(뒤에 '고무신'으로 개제)가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입선되고, 1950년 단편 '머루'가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이 해에 오영수는 청마 유치환 등과 함께 동부전선(제3사단 22연대) 종군작가로 나섰다. 1951년 부산시 동구 수정동 664로 이사했다. 차녀 영아가 태어났다. 오영수는 부산중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19554년 조연현과 함께 문예지 <현대문학> 창간을 위해 서울로 올라와, 아우 오생근의 집에 머물렀다. 1955년 평론가 조연연씨가 주간(실무책임자), 오영수가 편집장을 맡아 1966년까지 일했다. 1955년 단편소설 '박학도'로 제1회 한국문학가협회상을 수상했다. <속, 낙향산고>에 당시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서울서 삽십년, 옆눈 한번 팔지 못하였다. 자신을 위해 택시를 타지 않았고, 양담배 한갑 산 적이 없었다. 친구들과 점심 한끼를 떳떳이 사보지 못하였다. 주간은 아침에 잠깐 들렀다가 딴 직장으로 가버리면 종일 사무실을 지켜야 했다. 실례지만 문단 거지들과 지방 문인들의 시중까지 그 알량한 월급으로 감당을 못해 원고료를 쬐끔 협잡을 해서 문인 거지들과 지방문인들의 찻값에 보태기 위해 아무도 몰래 서랍에 넣어두고, 반품을 표지만 뜯어버리고 휴지로 팔아 충당하기도 하였다.'
1957년 서울 성북구 돈암동 250번지로 이사했다. 1959년 단편소설 '메아리'로 아세아자유문학상을 수상했다. 1963년 서울 도봉구 우이동 골짜기로 이사했다. 1966년 지병(위궤양)으로 현대문학사 실무에서 떠나 이듬해 수술을 받았다. 1968년 한국문학가협회 소설분과위원장, 1970년 한국문인협회 소설분과위원장에 피선됐다. 1974년 서울 도봉구 쌍문동 486번지로 이사횄다. 지병이던 위궤양으로 사경을 헤매다가 회생하면서 아호 '월주'를 '난계'로 바꾸었다.1977년 3월15일 오영수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울주군 웅촌면 곡천리로 낙향했다. 대숲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시골집을 하나 구해서 구둘을 고치고, 도배를 하고, 대를 쪼개어 사립문을 얽어 달았다. 그리고 그 집을 침죽제(枕竹齊)로 명명했다.
침죽제에서 생활하며 오영수는 부산과 울산의 제자들과 문인들이 찾아 오면 기꺼운 마음으로 함께 어울렸다. 추어탕집으로 문우들을 데려가기도 하고, 막걸리를 주거나 받거니하면서 문단 아팎의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윤정규, 최해군, 구본룡, 윤진상, 정종수 등 부산의 문인과 김영진, 이재기, 서상연, 김성춘, 신필주 등 울산의 문인들이 침죽제를 자주 찾았다. 오영수는 생전에 낚시와 난을 특히 좋아했다. 침죽제 앞의 도로를 건너면 술도가가 있고, 그 아래 소롯길을 따라 내려가면 회야강이 나타났다. 오영수는 그 화야강 주변 바위나 풀숲에 터를 잡고 앉아서 낚시를 드리웠다.
오영수는 대숲에 비가 내리는 밤이면 만돌린을 켜면서 대중가요 <고향초>와 <울릉도 뱃사공>을 애수어린 목소리로 노래했다. 1979년 <문학사상>(1월호)에 발표한 '특질고'를 발표했다. <특질고>는 우리나라 각 지방의 방언과 지방색의 특질을 다룬 작품이다. 그러나 이 글로 해서 한국문인협회로부터 제명되는 등 뜻하지 않은 필화사건에 휘말렸다. 이 해에 <월간문학>(2월호)에 마지막 작품인 편지를 발표했다. 오영수는 특질고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짐짓 초연한 자세로 사태의 심각성을 속으로 삭였다. 그러는 가운데 충격의 여파가 깊어져 지병인 위궤양이 다시 악화됐다.
대바람소리가 유난히 화사하던 날 밤, 오영수는 아들과 제자가 두는 바둑을 말없이 지켜 보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인 1979년 5월15일 오영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향년 71세. 오영수는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 선산에 묻혔다. 1983년 5월15일 울산문협(지부장 서상연)과 부산소설가협회는 공동으로 오영수의 무덤가에 '작가 오영수 여기 잠들다'라고 적은 묘비를 세웠다. 1992년 10월30일 오영수문학비건립위원회는 울산문화원 뜰(지금의 남구문화원)에 '오영수 문학비'를 건립했다.
1993년 5월15일 지역일간지 울산매일이 오영수의 문학정신을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 <오영수문학상>을 제정하고, 매년 전국의 작가를 대상으로 수상자를 선정해 시상을 해오고 있다. 1996년 '문학의 해'를 맞아 언양초등학교 총동창회는 교정에다 동문 소설가를 기리는 '오영수문학비'를 세웠다. 1999년 소설가 이재인(경기대 교수)은 오영수의 소설미학과 삶을 탐구한 연구서 <오영수문학연구>(문예출판사)를 펴냈다. 오영수는 전형적인 단편 작가로 한국적인 소박한 인정이나 서정의 세계에 기조를 두고 있는 작품들을 창작했다. '화산댁이'(1952), '윤이와 소'(1952), '코스모스와 소년'(1953), '갯마을'(1953), '박학도'(1955), '여우'(1957), '후조'(1958), '명암'(1958), '메아리'(1959), '은내골 이야기'(1961), '수련'(1961), '실걸이꽃'(1968), '어린 상록수'(1975) 등 150여 편의 단편을 발표했다. <머루>(1954), <갯마을>(1956), <명암>(1958), <메아리>(1960), <수련>(1965), <황혼>(1976), <잃어버린 도원>(1978) 등의 창작집과 <오영수전집>(1968), <오영수대표작선집>(1974)이 있다. 1955년 한국문학가협회상, 1960년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수상했다.
두개의 오영수문학비. 1992년 10월30일 오영수문학비건립위원회가 남구문화원 뜰에 건립(왼쪽) 했으며, 1996년 모교인 언양초등 교정에 이 학교 총동창회가 동문 소설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