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izabeth Keith (1887~1956)
1887년, 스코틀랜드 에버딘셔의 바람 많은 들판에서 태어난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훗날 동방의 작은 나라를 사랑하게 될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입니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은 누구보다도 섬세했고, 마음은 누구보다도 깊었습니다. 1915년, 언니 엘스펫과 형부의 초청으로 일본을 잠시 방문할 예정이던 그녀는 결국 그 땅에 머물기로 합니다. 훗카이도를 비롯한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붓을 들었고, 낯선 동양의 빛과 색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19년 3월 28일 삼일운동의 함성이 아직 가시지 않았던 조선 땅, 부산항에 그녀가 내립니다.
총칼을 찬 일본 경찰, 검문을 받는 조선 사람들, 그러나 그 속에서도 꿋꿋이 한복을 차려입고 살아가던 이들의 표정. 그녀는 풍경을 보았지만, 동시에 사람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짧은 여행일 뿐이던 조선은 그렇게 그녀의 삶 속으로 깊이 들어왔습니다. 서울 동대문 근처의 보구녀관 그녀는 그곳에 머물며 서울과 평양, 함흥과 원산을 오갔습니다. '보구여관' 은 한국 최초의 여성병원이자 여성 의학교육기관으로, 훗날 이화의료원의 전신이 되는 역사 깊은 공간이었습니다. 여성과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던 선교사들의 숨결이 남아 있던 그 자리에서, 엘리자베스 키스는 조선 여인들의 단아한 자태와 아이들의 눈망울을 그려냈습니다.
보구녀관(普救女館)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성병원이자 여성 의학교육기관이며,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이화의료원의 전신입니다. 보구녀관의 역사는 윌리엄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이 설립한 시병원(施病院)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885년 5월 윌리엄 스크랜튼은 조선에 도착하여 제중원에서 6주간 근무하고 자택 진료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사택 옆에 한옥 4채를 구입하여 병원을 세웠고, 고종 황제로부터 시병원이라는 명칭을 하사받았습니다. 이는 윌리엄 스크랜튼의 조선 이름인 시란돈(施蘭敦)을 차용하고 ‘베풀다(施)’라는 의미를 함께 담고 있습니다.
1919년 가을, 도쿄에서 수채화 전시를 열었을 때, 신판화 운동을 이끌던 와타나베 쇼자부로의 권유로 그녀는 한 작품을 목판화로 제작합니다. 〈달빛 아래의 동대문〉고요한 밤, 은빛 달빛에 잠긴 성문 그 작품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그녀는 평생 약 120여 점의 목판화와 동판화를 남깁니다. 그중 80여 점이 한국과 한국인을 주제로 한 작품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단순한 이국 취미가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그림 속 조선은 연약하지 않았고, 비참하지도 않았습니다. 고요하지만 존엄했고, 슬프지만 아름다웠습니다. 그녀는 그림만 남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식민지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일본과 조선을 오가며 조선인의 고통을 글로 기록했고, 결국 《Old Korea : The Land of Morning Calm》이라는 책을 펴내어 서구 사회에 조선의 현실을 알렸습니다. 예술가의 눈으로, 그러나 양심의 قلم으로 쓴 기록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한 여성이 낯선 나라 조선에서 5년을 더 머물며 그들의 얼굴을, 옷자락을, 삶의 숨결을 담아냈습니다.
그녀의 판화 속 한복은 바람에 흔들리고, 동대문 위의 달빛은 여전히 차분히 흐릅니다. 시간은 흘렀지만, 그녀가 남긴 조선은 아직도 따뜻합니다. 달빛 아래 성문을 바라보던 그 시선처럼, 엘리자베스 키스는 식민지의 어둠 속에서도 사람의 품위와 빛을 그려낸 화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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