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1.1~11/2(1박2일) 09:00~
'청춘의 바다, 울산을 걷다'
서울권, 문경권, 그리고 경상권 곳곳에서 출발한 친구들이 마치 오랜 약속이라도 한 듯,아침 10시, 울산박물관 앞에 모두 모였습니다. 멀리서 달려온 얼굴마다 반가움이 피어올랐고, 가을 바람은 살짝 코끝을 스치며 여행의 문을 열었습니다. 울산박물관에서 만난 문화해설사님은 선사시대의 반구천 암각화(巖角畵)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고래와 호랑이, 사슴과 멧돼지, 340여 종의 생명들이 바위 위에 살아 숨 쉬는 듯했습니다
공업도시로 알려진 울산의 뿌리가 사람과 자연이 함께 어울리던 삶의 터전이었음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점심 식사 후에는 고래박물관과 고래문화마을, 그리고 고래체험관을 둘러보았습니다. 모노레일을 타고 오르던 길, 해발 80m에서 바라본 울산대교는 장엄(莊嚴)했습니다. 배들이 쉼 없이 드나드는 항구의 풍경, 그리고 그 위로 햇살이 반짝이던 순간 그곳에서 우리는 모두 어린아이처럼 감탄했습니다.
전망대에 오르니, 울산의 심장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태화강이 유유히 흐르고,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의 위용(偉容)이 어깨를 나란히 했습니다. “이 도시가 이렇게 아름다웠나…”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울기등대는 여러 사정으로 발길을 돌렸지만,주전 몽돌공원의 바다는 그 아쉬움을 잔잔히 위로해주었습니다.
해질녘, 숙소(宿所) 근처의 횟집에서 싱싱한 회 한 접시, 소주 한잔에 웃음이 넘쳤습니다. 바닷바람에 섞여 울려 퍼지는 친구들의 웃음소리 그것만으로도 여행의 이유는 충분했습니다. 다음 날, 우리는 새벽녘 몽돌공원 해변을 거닐었습니다.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고,드디어 첫 햇살이 바다 위로 솟아올랐습니다. 모두 두 손을 모아 소망을 빌고, 그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며 “이 아침을 오래 기억하자”고 마음속으로 약속했습니다.
아산로(牙山路)를 따라 현대차 수출선적부두를 둘러 보며 이동한 태화강 국가정원에서는 울산큰애기와 대나무숲을 거닐며 가을빛이 머문 정원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도시의 분주함도, 세월의 무게도 잠시 내려놓고 우리 모두가 한 폭의 그림 속을 걷는 듯했습니다. 울산은 내게 단순한 생활의 터전이 아니라, 제2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43년 동안 애정으로 살아온 이 도시가 이토록 반가운 친구들을 맞이하게 되어 가슴이 벅찼습니다.
끝으로 멀리서 찾아와 함께 걸어준 친구들, 끝까지 안전하게 동행해 준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날의 햇살과 바람, 웃음과 추억이 우리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 다시 만날 그날까지 따뜻하게 빛나길 바랍니다. 우리의 청춘을 다시 한 번 꺼내 본 따뜻한 추억의 시간이었습니다. 물결처럼 잔잔했던 가을 햇살 아래, 울산 국가정원을 끝으로 우리 사임당의 여정도 아쉽게 막을 내렸습니다.
산들바람이 불어오던 길목, 조금 빠른 점심으로 찾은 할머니 손두부집에서는 정갈한 두부 한 모와 따뜻한 막걸리 한 잔이 그동안의 추억을 달래주는 듯했습니다. 모두가 환한 얼굴로 다 같이 총평(總評)을 나누는 자리, 그 중심엔 언제나처럼 꼼꼼한 김양희 총무님이 계셨습니다. 여행의 시작부터 끝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살뜰히 챙겨주신 그 손길, 진심 어린 봉사와 헌신(獻身)에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제 바톤은 前한일은행출신 '남미숙' 친구에게로 이어졌습니다. “제가 해 볼게요.” ㅋ
짧은 한마디에 모두의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 따뜻한 순간, 서로의 눈빛에는 오랜 우정의 믿음이 고요히 흐르고 있었습니다.26년도에는 김천 직지사로 어린 시절 수학여행의 추억(追憶)을 따라 다시 한 번 모이기로 했습니다. 4월의 두 번째 토요일, 손에 손을 맞잡으며 “그때 꼭 만나자” 약속했습니다.
울산은 산업의 도시이자, 시민의 땀과 희망으로 빚어진 삶의 무대입니다. 이제는 공단의 불빛 너머로 자연이 숨 쉬는 장생포와 영남알프스의 능선을 바라보며, 다음 만남에선 천황산과 재약산의 바람 속에서 함께 웃을 날을 그려봅니다.
짧은 1박 2일이었지만 그 안엔 세월이 담긴 우정, 서로를 향한 따뜻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다시 만날 그날까지, 사임당의 이름으로 🌸
친구들 사랑합니다. ^^
채희동 씀













故 정주영 회장의 500원 거북선 이야기는 1970년대 한국 조선업이 불가능해 보였을 때, 그가 500원 지폐의 거북선 그림을 영국에 보여주며 한국의 조선 기술 능력을 강조해 차관을 유치한 일화를 말합니다. 당시 한국은 조선소를 지을 돈, 기술, 경험이 부족했지만, 500원 지폐 속 거북선을 통해 16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던 나라인 점을 부각하며 설득했습니다. 이 설득 덕분에 영국에서 차관을 지원받아 울산에 조선소를 세우고 배를 만들기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故정주영회장님의 정신을 배우고 싶다. 이봐 해 봤어? 해 보지도 않고 안된다는 말을 통 하지 않은 분이 였습니다. 저도 딱한 현장에서 봤습니다. 그 당시 포니차는 가솔린 내연기관 차 였다. 정회장님의 지시사항은 디젤엔진을 올려서 시험하고 결과를 보고 하는 자리에 품평을 왔는데 내 나이 23살 멀리서 봤는생진 처음 뵈었습니다. 키도 엄청 큰고 정말 잘 생긴 미남이였습니다. 사장, 상무, 이른 분들이 작은 수첩들과 기록하기 바빴다. 나도 그 때부터 현장관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작은 수첩을 습관화 했고 그게 나의 업무일기장 또는 나의 생각을 기록 하시 시작 했습니다.
40년 넘게 저를 정년퇴직 하도록 하고 먹고살수, 있게 하고 ,결혼하고 자녀공부시키고 출가 시킨것은 나의 노력도 있었지만 故정주영회장님의 듣(淂)으로 생각 합니다. 난 시간날때 아산 기념관을 찾아서 두손을 모우고 고개를 숙입니다. 늘 저는 정주영회장님을 존경하고 책도 3권을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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