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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여정(旅情)/문화예술(藝術)

서대문형문소

by 사니조아~ 2024. 1. 14.

24.1.13(토) 11:00

서대문형문소(西大門刑務所)

서울에 갈일이 있을땐 간혹 3시간 일찍 가서 그곳에
 문화재탑방, 북한산산행, 서점, 오디오 샵도 둘러 보고
때론, 동대문 시장에 가서 서민들이 즐겨 먹는  소머리곰탕
돼지국밥 등을 먹으며 오뎅 하나 사 먹으면 그곳이 행복의
가치를 가지는 우리 서울 여행이 일부이다 .

그리고 좀 피곤 하면 하루밤 깨끗한 게스트 룸에서 여행객들과
정보를 나누며 어느 코스로 산행을 할건지 정보를 나누며
산 벗이 되는 것은 일상적인 여행의 표준이 된다. ㅎㅎ

좀 일찍 서울에 도착하면 길상사나 ,  영풍문고나
결혼식 참석을  해도  충분 할것 같아서 좀 여유가 있었다.

서울역에 내리자 마치 '왈우'  강우규 의사의 동상앞에 섰다.

아주 적흥적으로  서울서대문 형무소  탑방하기로 했다.  
광복운동  민주화 운동을 하시다가  순국 하신   분들의  
생각을 하면 가슴이 두근 거린다.   안산 아래  남대문형무소
붉은 벽돌이  인상적이다.

늘 동경해 왔던 서울의 문화유산은 조선의 5대 궁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있잖아요 ^^
이미 다 둘러 본 곳이라  서울을 여행시에는 유흥준선생님
나의 유산답사기 9번 서울편1 만 보아도 철철 넘친다. ㅎㅎ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왈우' 강우규의사는  1919년 9월 2일
남대문정거장 (현 서울역)에서 일제 강점기 제3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마코토(齋藤實) 일행을 향해 폭탄을 투척해
대한인의 자주독립 의지를 천명했잖아요^^
일본 역사는 제대로 알고 넘어 가야 하잖아요 ^^

정부가 아무리 일본을 좋게 보는 정부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안 봅니다.
서대문 형무소를 재대로 공부하고 가야만 그게 눈에 보이 잖아요
그게 여,야를 떠나서 우리 민족은 일본인에게 수 많은 목숨을 무시 무시
잃었습니다.
 


역사의 비극과 아픔을 잊지 않는 방법 중 하나는 ‘다크투어리즘’이라 할 수 있다.
 1948년 10월 19일, ‘동포의 가슴에 총을 겨눌 수 없다’며 제주출동을 거부하고
 여수에서 일어 난 ‘여순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큰 아픔’이다.

 광양지역도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고 백운산이 있어 피해기간도 길었다. 다른 
도시가 갖고 있는 학살의 흔적, 수탈의 흔적을 찾아 ‘여순사건’의 비극을 알리고, 
희생자와 그 유족의 고통과 깊은 상처에 공감하고자 한다. 

“1908년 일본이 만든 경성감옥(京城監獄)에서 출발, 이후 1987년까지 80여년간 운영”
“일제강점기, 강우규·유관순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투옥, 고초를 겪고 목숨을 빼앗긴 현장”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와 선열들의 자주독립정신을 배울 수
 있는 역사 교육의 장으로 삼기 위해 옛 서대문형무소를 원형그대로 보존, 1995년
 공사를  시작하여 1998년 11월 개관했다. 서대문독립공원 내에 있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정부수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개관, 3.1운동 직후 유관순 열사가 
투옥되어  숨을 거둔 지하 옥사와 감시탑, 고문실, 사형장, 옥사 7개동, 역사전시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세워졌던 경성감옥(京城監獄)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기 시작, 이후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이 
몇 차례 바뀌었고 일반적으로 서대문형무소로 불렀다.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독립운동
가들이 투옥되어 고초를 당하고 목숨을 빼앗긴 현장으로, 1920년대 초반 독립운동이
 치열해지자 일제는 그 규모와 시설을 대규모로 확장했다. 

해방 이후에는 1945년 서울형무소, 1961년 서울교도소, 1967년 서울구치소로 명칭이 
바뀌었고, 군부·독재 정권에 저항했던 수많은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투옥되어 고초를 
겪은 현장이었다.

 

980년대 서울의 도심 팽창으로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게 되면서 서대문형무소의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고자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서대문구를 중심으로 보존
운동이 펼쳐졌고, 옥사 일부와 사형장이 1988년 사적으로 
지정됐다. 

이후 서대문구가 나서 대한민국 근현대역사를 보여주는 생생한
 역사 체험의 현장으로 조성, 박물관 조성사업이 추진됐고 1998년 
11월 5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학생, 어른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되어 상상할 수 없는 심한 고문 등으로 고초를 겪은 독립투사들을
 기억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서대문형무소의 건물은 주로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이후 독립운동가의 급증으로 신축된 것들로 붉은 벽돌로 지어 진
 보안과청사(保安課廳舍), 중앙사(中央舍), 제 9·10·11·12옥사(獄舍), 
공작사(工作舍), 한센병사(病舍), 사형장(死刑場), 유관순 지하감옥
(柳寬順 地下監獄), 망루와 담장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이 중 제10·11·12옥사와 사형장은 1988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보안과청사를 활용한 전시관에서는 형무소역사실, 민족저항실Ⅰ·Ⅱ·Ⅲ, 
지하고문실, 영상실을 갖추어 서대문형무소 및 수감 인사들의 관련 
유물과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사형장은 서대문형무소 남쪽 끝에 있다. 일제는 1923년에
 사형장 근처에 미루나무를 심었다. 짚으로 만든 ‘용수’를 쓰고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독립투사와 민주투사들은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마주하고 이 나무를 붙잡고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통곡의 미루나무’다. 이 미루나무는 수령
 100년을 채우지 못하고 2020년경 태풍에 쓰러졌고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이 나무를 누운 모습 그대로 보존해 사형장의 역사와 
아픔을 잊지 않게 하고 있다. 체험학습을 온 초등학생들, 어린 
아들과 함께 온 젊은 중국인 아버지, 혼자 온 필리핀 청년, 눈이
 파란 서양인 가족들... 많은 이들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찾고 있다.   


                              ▲ 물 고문이 자행됐던 지하 조사실  지금이 예나 다를 바가 없다  

▲ 고문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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