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8(일) 10:00
울산을 출발 250KM를 달려 봉암사 문앞에(XYL) 도착했습니다.
보안상 출입허가를 신고하고 출입을 하는건 기본수칙이다.
봉암사 희양산을 묵묵히 가은읍 원북리 아침배미를 바라보고
오봉정에서 흘러 내리는 물소리는 고요하게 흘러만 간다.
예전에 봉암사 앞에 여러상점은 이미 철거되고 봉암사측에서
명상센터를 운영하는 조건으로 문경시와 합동으로 철거가 되면서
좀 쓸쓸한 봉암사 절앞이 되고 말았다.
주차를 하고 90분간 도보로 오봉정 까지 올라야 하는 번거러움은
70년째 되고 있다. 사찰경내를 일채 경유하지 않고 마애미륵여래좌상
에 들려 합장삼배하고 직진하여 오봉정 동내 앞에 들어 서니
형채를 알기 어려울 청도로 얼음 덩굴이 꼭 미국의 개선문이 된것 처럼
우리를 반기듯 하다.
친구 형순이가 사천에서 살다가 가은읍 죽문리로 이사를 해 왔다.
애기 암봉을 넘어서서 등산을 하면 오봉정까지 올수 있는데
등산로가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등고선 등 GPS상으로 보면
경사로가 있고 험로로 예상되지만 송이채취를 위한 방법이라면
몰라도 출입은 오해를 받기 일수 이다.
산소로 진입하는 경로는 어렵게 찾아 내고 출입구를 가지고 간
낫과 도구를 통해 20분간 진입경로를 작업을 했더니 헌 하게
모양새가 헐씬 났다. 조부모님 2상부 벌초를 하고 산소를
찾는데는 GPS를 가지고 안가면 찾기 어렵습니다.
산새를 정말 좋은데 산소는 낮아져있고 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오봉정 벌초를 마치고 봉암사에 다시 왔습니다. 70년전 금색당에서
저는 삼배를 합니다. 우리 부모님은 금색당과 과거 대웅전이지요.
인연이 많은 곳입니다. 스님들의 수행이 0.1라도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정숙을 생명으로 여깁니다. 물론 휴대폰은 통신기지국을 없애더군요
와이파이고 SK, LG, KT 삼사가 봉암사 경내에서는 통신이 안 되도록
안테나 시설설치 허가를 안 했던것 같습니다. 몇년전만 해도 되었는데
있는것도 다 철거를 한것 같습니다.
제가 찾는 봉암사는 금색당과 극락전입니다. 국가 보물이잖아요.
물론 저 하고도 인연이 많은 암자 입니다.
일주문입니다.
일주문은 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이다. 기둥이 양쪽에 하나씩 되어 있어서
일주(一柱)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모든 진리가 하나라는 뜻이다.
봉암사 일주문은, 일주문을 만들 때 특별히 갖추어야 하는 특징에 맞추어
세웠는데 그 모습이 매우 소박하다. 1900년대 사진을 보면 일주문을 세운
시기를 18세기 전후까지 추정할 수 있는데, 당시의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
되어 있다.
봉암사는 신라 말에 세웠다. 고려 때 희양산 선문의 중심 사찰이었고, 조선
시대 때 함허 득통 화상이 다시 지었다. 봉암사에는 많은 전각과 석조 유물이
남아 있는데, 이 가운데 목조 건물로는 봉암사 극락전(보물 제1574호)과
봉암사 일주문이 가장 오래되었다.
봉암사 희양산은 우리선정있어서
오봉정은 1년에 1번 꼴로 올라 간다.
최근 초중고 학생다닐때 친구들과 함께
옥석대 까지는 간혹 올라 갔다.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에 있는
조계종 특별선원 봉암사이다.
타지에서도 가은 역에 내려서
봉암사까지 계속 걸어가야만 했다.
버스를 타고 갈수도 있지만 차 시간은
한정 되어 있고 소풍길은 고역이 였을때도
있다. 그래서 '선생님, 아직 멀었어요?'
물어본 것과 ''조금만
가면 된다''는 대답만 듣고 무작정 걸었던
기억 , 사복 입으면 안 되고 교복 입어야 했다.
지금 생각해도 가은역과 봉암사는
5 km 이상은 될 듯하다.
논과 논 사이 길을 걸어가는데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다 모퉁이를 돌아서면
희양산이 보이면서 안도의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봉암사 절앞은 술집과 상점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찾아 보기 어렵다.
.
전방 30M앞에 나무석가모니 불이라는 붉은 글이 양각으로 되어 있습니다.
봉암사의 매력은 이 마사를 밝고 봉암사로 올라 가는 이 길인 너무 좋습니다.
자연이 오염되지 않고 환경은 그래도 살아 움직입니다.
문경 봉암사 마애미륵여래좌상 (聞慶 鳳巖寺 磨崖彌勒如來坐像) 보물2108호 21.1.5 문화재청지정
지금부터 약360년 1663년(현종 4)에 제작된 마애불로서, 봉암사 옥석대(백운대라고도 함)에 위치해 있다. 제작시기와 주관자에 대해서는 풍계 명찰(楓溪 明察, 1640-1708)의 문집『풍계집(楓溪集)』에 수록된 「환적당대사행장(幻寂堂大師行狀)」을 통해 확인된다. 명찰은 17세기 승려 환적당 의천(幻寂堂 義天)의 제자로 이 책에 환적당이 주관해 마애불을 조성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환적당 의천은 1630년 경북 선산에서 태어나 11세에 출가하여 88세 되던 1690년에 해인사 백련암에서 입적했다. 환적당이 봉암사에서 처음 수행한 것은 60세(1662년)부터 61세까지로, 행장에 의하면 백운대에 이 마애미륵여래좌상을 조성하고, 사적비를 세웠으며 환적암(幻寂庵)을 지었다고 한다. 보살좌상은 높이가 539.6cm, 너비가 502.6cm 정도이며 머리 주변을 깊게 파서 광배 형상을 만들고, 위는 깊고 아래쪽으로 내려오면서 점차 얕은 부조로 처리했다.
머리는 소발(素髮)이고 둥글고 갸름한 얼굴에 오뚝한 콧날, 부드러운 눈매, 단정히 다문 입 등이 조화를 이룬 인상이다. 목에는 삼도(三道)를 옅게 표현했고 양쪽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通肩)이며, 주름은 간결하게 처리하였다. 가슴에는 수평으로 걸친 군의와 이를 묶은 띠 매듭이 표현되었고, 주름은 강약과 완급을 조절하며 절제감 있게 새겼다. 앉은 모습은 길상좌(吉祥坐)이며, 노출된 오른발은 불상의 크기와 넓은 무릎에 폭에 비해 작은 편이다. 특히 얼굴과 자세, 착의법 등 세부표현에서
<나주 죽림사 세존괘불탱>(1622),
<구례 화엄사 영산회괘불탱>(1653년),
<하동 쌍계사 팔상전 영산회상도>(1688년),
<여수 흥국사 영산회상도> (1693년)
17세기 괘불에서 보이는 표현요소를 찾아 볼 수 있어 불화와 상관관계를 엿볼 수 있다. 이 불상의 수인(手印)은 용화수인(龍華手印)으로, 두 손으로 긴 다발형의 꽃가지를 쥐고 있는 모양이다. 1663년이라는 뚜렷한 제작연대를 염두에 둘 때 마애불 도상이 확인된 기준작으로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보물 문경 봉암사 마애미륵여래좌상은 문헌을 통해 제작시기와 제작동기, 발원자, 도상 등에 대해 고증이 가능한 몇 안 되는 마애불이라는 점, 조선 후기 마애불 연구뿐만 아니라 미륵불상의 도상 연구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자료라는 점에서 역사적ㆍ학술적 가치가 높다. 또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사실적인 조각수법, 당대 불화와 연관성이 있는 창의적 표현 등 예술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되므로, 보물로 지정해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 (국가유산 포털 인용)
그리고 계곡물이 흐르는 주변에는 白雲臺(백운대) 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바위도 있구요.
얼음덩굴이 오봉정을 알리는 문인것 같습니다. 시간만 되면 손을 보겠는데 시간상으로 그렇게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내년에는 봐서 좀 손을 봐야 겠어요 ^^
오봉정은 70년전에 12가구가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6,25사변이 끝나고 맥아더장군이 입성하면서 낙동강전투 등
인민군들이 후퇴하는 길목입니다. 이 오봉정을 넘어면 충북 괴산군이 나오고 한양 서울로가는 길이 나옵니다.
70년 우리가 살았던 집터 뒤안길이라고 들었습니다. 돼지무리가 산에서 내려와 완전 놀아터를 잡아 물청소를 해 났더군요
무두실 조카용수가 10년전 적색 락카로 표시한 출입구 입니다.
대나무밭을 30M지나면 개울가가 나옵니다.
진공문을 통과하면 봉암사 선원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선원에는 曦陽山門太古禪院 (희양산문태고선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습니다
봉암사 선원의 역사는 신라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며 지증대사 도헌스님이
구산선문 중 하나인 희양산문을 이곳에서 개창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대고 보우국사를 비롯한 많은 수행자들이 이곳에서 정진을 하였다고 하며
동방의 승도는 절을 참배하고 도를 물을 때 반듯이 이곳을 찾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곳은 출입이 금지되어 들어가 볼 수는 없었습니다
[출처] 고전문학 속 천년 고찰, 일년에 한번 개방하는, 문경 희양산 봉암사|작성자 대청봉
금색당과 보물 제169호, 문경 봉암사 삼층석탑"
보물 제169호 봉암사 삼층석탑을 둘러보고 이제 금색전을 둘러 봅니다
금색전은 원래 봉암사의 대웅전이었는데 지금은 원통보전이 그 자리를 지키고
금색전은 현재의 자라로 옮겼다고 합니다
금색전의 주련을 살펴보면
天上天下無如佛천상천하 어디에도 부처님 같은 분이 없나니
十方世界亦無比시방세계에도 비할대 없네
世間所有我盡見세상 천지 내가 다 보아도
日切無有如佛者부처님 같이 귀하신 분 없도다
이런 뜻이라고 합니다(금색전 오른쪽 부터)
[출처] 고전문학 속 천년 고찰, 일년에 한번 개방하는, 문경 희양산 봉암사|작성자 대청봉
1947년 봉암사 결사는 한국불교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해방 직후 당대의 수좌들이 모여 철저한 참선과 계행(戒行)으로 일관함으로써 일제강점기의 잔재에 찌든 한국불교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정법(正法)을 지향하는 종단의 근간을 다진 사건이라는 공통된 평가다. 조계종 전국선원수좌회(공동대표 정찬·현묵스님)와 성철스님의 유지를 계승하는 백련불교문화재단(이사장 원택스님)은 올 가을 봉암사에서 결사 70주년 기념법회를 공동으로 주최할 예정이다.
청담스님, 성철스님, 자운스님, 향곡스님을 비롯한 30여 명의 수좌들이 의기투합했다. 2014년 원적(圓寂)에 든 전 조계종 종정 법전스님은 봉암사 결사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사의 기간은 1947년 10월부터 1950년 3월까지로 2년6개월 남짓. 비교적 짧은 시간이지만, 종단의 청정가풍을 복원했다는 점에서 매우 값지다.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는 논문 ‘봉암결사의 역사적 의미’에서 “결사의 정신은 불교정화운동의 이념적 모태가 되었다”며 “조계종단 재건과 운용의 기초를 제공했다”고 짚었다.
결사는 최고의 선지식이자 절친한 도반이었던 청담스님(1902~1971)과 성철스님(1912~ 1993)의 만남에서 비롯됐다. 청담스님의 행장과 법문을 모은 <청담대종사전서>에 의하면 두 스님은 1942년 선학원에서 만나 공동수행을 약속했고 1943년 법주사 복천암에서 함께 수행했다. 독립운동가를 도왔다는 이유로 청담스님이 상주경찰서에 구금되면서 짧게 끝난 ‘2인 결사’는, 1944년 봄 문경 대승사에서 재개됐다.
당초 청담스님과 성철스님이 꿈꿨던 건 대규모 종합수행도량인 총림(叢林)의 건설이었다. “지금과 같은 말법시대에 부처님 당시처럼 짚신 신고 무명옷 입고 최대한 검소하게 생활할 것, 그럼으로써 납자 풍의 참모습과 말없는 가운데 풍길 수 있는 그런 중노릇을 하자는 등의 이야기를 밤새도록 대승사 쌍련선원에 앉아서 하셨다.” 청담스님의 딸인 묘엄스님(전 봉녕사승가대학장, 2011년 입적)이 <고경> 제10호에 남긴 회고다.
총림을 설치하려던 절도 원래는 봉암사가 아니라 청담스님이 선감(禪監)으로 일하던 법보종찰 해인사였다. 해인사가 봉암사보다 사격이 컸다. 그러나 야심찬 계획은 해인사를 장악한 대처승들의 비협조로 무산됐다. 결국 대승사 인근의 봉암사가 대안으로 선택됐다. 우리나라 선불교가 태동한 구산선문의 한곳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이 세워졌던 사찰인 만큼 상징성은 해인사 못지 않았다.
봉암사 결사가 시행될 수 있었던 직접적인 계기는 ‘책들’이었다. 1947년 여름 김법룡이란 이름의 거사가 소장하고 있던 불교서적 수천 권을 기증하겠다고 청담스님과 성철스님에게 제의했다. 서울로 올라와 불서를 인수한 스님들은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전을 봉안하는 사찰을 총림으로 하자’는 데 인식을 같이 했다. 건네받은 불서를 봉암사로 보냈고 그해 10월 성철스님, 자운스님, 우봉스님, 보문스님 등 4명이 봉암사에 입주했다. 봉암사 결사의 역사적인 출발이다.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 봉암사 결사를 이야기할 때 흔히 회자되는 모토다. 방부를 들인 수행자들은 비(非)불교적 요소 일체를 없애거나 뜯어고쳤다. 무엇보다 사찰이 점집으로 전락하는 데 기여한 기복신앙이 척결대상이었다. “칠성탱화, 산신탱화, 신장탱화 할 것 없이 전부 싹싹 밀어내 버리고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만 모셨다(성철스님).” 복을 빌어 달라며 여염집이 부탁하는 불공을 전부 거절했으며 살림은 철저하게 자급자족으로 유지했다. 나무 하고 물 긷고 밭 갈고 탁발하는 일이 일상화됐다. 또한 율장에 근거해 관습적으로 유행하던 홍(紅)가사 대신 현재 종단 가사색의 모태인 괴색(壞色)으로 가사를 물들여 수했다. 발우도 목(木)발우를 버리고 철(鐵)발우를 썼다. 이것들은 현재 종단 스님들의 복식(服飾)과 위의(威儀)의 근본이 됐다.
단체생활을 위한 일련의 수칙은 공주규약(共住規約)이란 이름으로 정리했다. 규약에는 참선 수행, 포살 실시, 능엄주 암송, 자주 · 자치정신 구현, 청규와 계율 준수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수행방식뿐만 아니라 승가의 의식주 전반에 개혁을 단행한 봉암사 결사는 수행자들 사이에 입소문을 탔다. 제대로 된 안거도량이 열렸다는 소식을 듣고 전국 각지에서 수좌들이 하나둘 찾아왔다. 이후 청담스님을 비롯해 향곡 월산 법전 성수 혜암스님 등의 선승이 속속 자리를 잡으면서 1948년 결사대중은 30여 명으로 늘어났다.
궁극적으로 봉암사 결사는 염결한 삶 덕분에 스님의 대사회적 위상을 비약적으로 높였다. 당시만 해도 조선시대 억불의 악습으로 승려들은 일반인들에게 천시와 반말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봉암사 대중 스님들은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좌선으로 일관하며 사람들의 불신과 냉대를 조금씩 씻어갔다. 스님은 무속인이 아니라 수행자임을 확인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스님에 대한 삼배(三拜) 문화 역시 봉암사 결사를 통해 자리를 잡았다는 게 정설이다.
결사를 주도하던 성철스님의 불호령이 압권이다. “스님은 부처님 법을 전하는 당신네 스승이고 신도는 스님한테서 법을 배우는 제자야. 법이 거꾸로 되어도 분수가 있지. 스승이 제자 보고 절하는 법이 어디 있어? 조선 500년 동안 불교가 망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는데, 그게 부처님 법은 아니야! 부처님 법에 신도는 언제나 스님들께 절 세 번을 하게 되어 있어. 그러니 부처님 법대로 스님들에게 절 세 번 하려면 여기 다니고, 부처님 법대로 하기 싫으면 여기 오지 말아!(<수다라> 10집, 1995년)”
아쉽게도 결사는 길지 못했다. 사회적으로 한국전쟁이 임박한 혼란기였다. 군경은 빨치산으로 빨치산은 군경으로 변장한 채 봉암사에 잠입해 스님들의 정치적 성향을 떠봤다는 전언이다. 수행은커녕 목숨마저 위협받는 지경이었다. 결국 1950년 3월 동안거 해제 직후 결사는 해체됐다. 그러나 오늘날 종단의 법통을 바로 세웠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재영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논문 ‘봉암사 결사의 정신과 퇴옹 성철의 역할’에서 “불교가 세속의 변화를 따라잡는 길은 세속의 가치와 질서를 초월하여 불교만의 세계를 올곧게 지키는 것”이라며 “그것이 바로 봉암사 결사가 우리에게 보여준 해답”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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