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18.3.24(토)
출처: 사진 대한산악연맹 등산교실 코너
알파니즘(Alpinism)이라는 말은 스위스를 가운데
두고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 등 다섯
나라에 걸쳐 있는 유럽 알프스의 고산 지대에 그
역사적 기원을 두고 있다.
불어의 Alpinisme에서 시작하여 영어 Alpinism,
독일어 Alpinismus, 이탈리아어로는 Alpinismo 등으로 불리며, 오늘날 등산을 뜻하는 국제 공통어가 되었다.
또한 등산가를 ‘알피니스트(Alpinist)', 등산학교
를 ’알파인 스쿨(Alpine school)' 산악회를 ‘알파인 클럽(Alpine club)', 등산용 지팡이를 독일어로 ’
알펜 슈톡(Alpenstock)' 이라고 하는 것도 모두 알파니즘에서 시작된 말이다.
등산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히말라야 등산을 ‘히말라야이즘’, 안데스 등산을 ‘안디니즘’ 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알피니즘은 등산의 역사적 기원 때문에
생겨난 말일뿐 ‘알프스 등산이라는 좁은 뜻이 아니라,
널리 일반적인 등산을 뜻한다’고 프랑스의 등산가
뽈 베시에르가 그의 저서 <알피니즘>의 첫 머리에서 밝히고 있다.
가. 알피니즘의 정의
그렇다면 알피니즘, 다시 말해서 등산이란 무엇인가?
등산(登山)은 산을 오른다는 뜻이지만, 원래 서구인의 사고 방식과 행동 양식에서 온 서구적 개념이다.
즉 등산은 알피니즘을 번역해서 만든 말이다.
등산에는 고전적 의미와 현대적 의미가 있는데, 전자는 모험과 도전의 의미가, 후자는 탈출 수단의 의미가
그것이다. 여기에는 등산의 역사에 따른 시대적 배경이 깔려 있으며, 등산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등산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것은
처음에 등산이 어떻게 시작하여, 어떤 과정을 밟아,
지금 어디까지왔는가 하는 이른바 등산의 역사를 대충이라도 훑어볼 때 비로소 그 가닥이 잡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피니즘의 정의는 다음과 같이
요약 할 수 있다. 영국에서 나온 등산백과사전
(Encyclopedia of Mountaineering)에는
알피니즘을 ‘눈과 얼음에 덮인 알프스와 같은
고산에서 행하는 등반’으로 풀이하고 있다.
나. 알피니즘의 역사적 기원
1760년 스위스 제네바의 대학 교수인 베네딕트 드 소쉬를가 샤모니에 가서 하늘 높이 솟은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Mont Blanc, 4,807m)을 보고, 정상에 오르는 길을 아는 자에게 상금을 내걸었다.
18세기라면 히말라야는 고사하고 알프스도 미지의 세계였다. 그 무렵 사람들은 몽블랑에 악마가
살고 있고, 눈사태를 일으킨다며 무서워했다. 그 몽블랑이 등정된 것은 그로부터 4 반세기가 지난 뒤였다.
몽블랑의 정복은 미지의 세계, 그 공포와 곤란함에 대한 도전이었다. 여기에는 알프스에 대한 숭고한
등산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이를 일컬어 알피니즘이라고 한 것이다.
등산은 산과 사람의 만남에서 비롯하지만, 사람과 산의 만남이 모두 등산은 아니다. 도를 닦으려
입산하거나 약초를 캐며, 짐승을 잡을 목적으로 산에 가는 것은 등산이 아니다. 승려나 심마니,
사냥꾼이 제 아무리 산을 잘 오른다 해도 우리는 그들을 등산가라고 하지 않는다. 등산은 행위
자체가 목적이어야 한다.
다. 알피니즘의 세계
알피니즘에는 알피니즘을 실현하기 위한 고유의 특수한 세계가 있다. 그것은 무형 또는 유형의
세계이며 일정한 테두리가 없는 것이다. 알피니즘의 무대는 대자연이다. 이 자연은 고산과 칼날
능선, 깎아지른 암벽, 눈과 얼음 그리고 넓은 공간과 허공 등으로 펼쳐지는 별세계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장시간에 걸쳐 극한적으로 벌어지는 알피니즘 활동은 한마디로 정신적이고
육체적이다. 심한 육체적 노력을 넘어서 정신적인 것을 얻는 것이 등산의 특권이고 본질이다.
등산은 지식욕과 탐험욕 그리고 정복욕의 소산이며, 이때 알피니스트는 진정 자기를 알고 자기를
지배하며 자기를 이긴다.
알피니즘에는 또한 알피니즘만이 가지는 특수성이 있다. 그것은 일반 스포츠와 비교할 때 더욱
확실해진다. 일반 스포츠에는 심판과 규칙과 승부와 관객이 있으나 등산에는 그런 것들이 없다.
나아가 가장 중요한 것은 프랑스 등산가 리오넬 테레이(L.Terry, 1921~1965)가 말한 ‘무상(無償)의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요컨대 등산은 자기 과시가 아니며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인간의 의식과
행동이며, 자연에 대한 가장 순수하고 가장 가혹하며 가장 신중한 도전이다.
라. 알피니즘 정신과 형식의 변천
몽블랑이 초등되던 1768년 8월 7일에, 서구 근대화의 전기를 마련한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이
완성되었다. 이를 두고 등산과 서구 근대화를 동일하게 ‘인간의 힘의 발로’로 보는 학자가 있다.
이처럼 서구 근대화와 출발점이 같은 등산은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발전을 거듭하여 왔다.
등산은 250년 가까운 시간의 흐름 속에 그 역사를 기록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안내 등반에서 안내자 없는 등반으로
몽블랑이 등정되자, 곧이어 만년설에 덮인 3~4,000m의 알프스 고봉들에 대한 도전에 불이 붙었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를 찾아가는 사람들은 지리도 잘 모르고 힘과 능력도 부족해서 그 지역 사람을
안내인으로 고용하고 그 뒤를 따라(Guided)가다가, 점차 안내자가 없는 산행(Guideless Climbing)
을 하게 되었다.
등정주의
이 무렵 그들의 산행 방식은 비교적 등반하기 수월한 산등성을 따라 정상에 오르는 산행이었다.
이런 형식을 등정주의(Peak Hunting)라고 한다.
이런 등정주의 산행 방식은 알프스 4,000m 급의 마지막 봉인 마터호른(Matterhorn, 4,478m)의
초등정(1865년)까지 계속되었다.
등로주의와 머메리즘
산등성을 따라 정상에 오르던 등반의 한 시대가 지나면서, 이번에는 산 허리나 가파른 절벽에 길을
내며 오르는 모험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길을 ‘Variation Route'라 불렀다. 또한 난이도가 점차
높아짐에 따라 자연히 보조 수단이 필요하게 되어 ‘인공 등반(Artificial Climbing)' 이 등장하게
되었다. 물론 당시의 보조 수단이라야 극히 초보적이고 소박한 것으로 나무 쐐기와 줄사다리
정도였다.
이런 험로 개척을 주장하고 나선 등산가가 바로 '머메리(Albert F. Mummery, 1855~1895)' 였다.
그리하여 그가 주창한 ’More Difficult Variation Route'의 산행 형식이 등정주의에 대한 등로주의로
그의 이름을 따서 머메리즘(Mummerism)이라고 하였다.
등산 무대의 변천
알프스의 4,000m 급 고봉들이 모두 등정되자, 보다 높고 어려운 대상을 찾아 나선 머메리는
19세기 말 히말라야 8,000m급 봉인 낭가파르밧(Nanga Parbat, 8,126m)에 도전하였고, 등반
도중 실종되고 말았다. 등산 역사에 있어서 순수 등반 대상지로 히말라야의 문을 두드린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낭가파르밧에 다시 등반대가 간 것은 그로부터 30년 뒤의 일이지만, 1953년에 가서야 이 고봉이
초등된 것을 보면 머메리의 히말라야 진출이 얼마나 앞서 있었던가를 잘 알 수 있다.
벽 등반 시대
등산무대가 알프스에서 히말라야로 옮겨가고, 에베레스트와 낭가 파르밧이 도전을 받고 있던
1930년대, 알프스에서는 아이거와 그랑드죠라스 그리고 마터호른의 3대 북벽이 전위적
클라이머들의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이 알프스 3대 북벽 등반은 등로주의의 절정이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난이도가 높은 동계 ‧ 직등 ‧ 단독 ‧ 속공 등반 형식으로 발전하면서
역사의 장을 새롭게 기록하게 된다.
대원정 시대
머메리의 낭가파르밧 도전 후 반세기가 지나 1950년에 최초로 8,000m 봉 안나푸르나가 초등되었고,
이후 1964년까지 히말라야의 최고봉 급 14봉이 모두 등정되었다.
이때의 히말라야 원정에 소요된 기간 ‧ 인원 ‧ 물자 ‧ 자금 등은 알프스 등반과 비교할 수 없는
큰 규모여서 ‘대원정’이라 부른다. 이런 형식은 1977년 한국 팀의 에베레스트 원정까지 4반세기가
넘도록 지속되었다.
무산소 ‧ 단독 ‧ 연속 등반
세계 등반사에서 일대 전환기라면 1978년을 꼽을 수 있다. 라인홀트 메스너(Reinhold Messner, 1944~)가
에베레스트를 산소통 없이 오르고, 3개월 뒤 낭가파르밧을 단독으로 등정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로써 등산계의 세기적 과제로 남아 있던 8,000m에서 무산소 ‧ 단독 ‧ 연속 등반이 모두 해결되어
알피니즘 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리기 시작했다.
알파인 스타일과 속공
알파인 스타일과 속공 역시 히말라야 등반의 새로운 장을 연 계기였다. 말 그대로 ‘알프스 식’이라는
뜻인 알파인 스타일은 히말라야의 8,000m 고소를 높이가 그 반밖에 안 되는 알프스에서 통하는 방식과
기술로 등반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극지법으로 오르면서 곳곳에 물자를 저장하던 전통방식에서
벗어나, 고도 순응만 끝나면 곧바로 정상을 향해 전진하는 등반 방식이다.
한편 속공으로 에베레스트를 24시간 안에 왕복하겠다고 오언하던 클라이머가 있었는데, 그는 결국 그
시간에 정상끼지 오르는 데 그치는 기록을 세웠다. 물론 기록은 계속 경신 되기 마련이다.
※ 극지법(極地法) : 히말라야 같은 고산에서 고도차 대략 500m 이상을 두고 캠프를 전진시키는 등반
전술로 본래 남극, 북극 탐험대가 사용했다
가. 더 오를 곳이 없다.
알파인 스타일 즉 알프스 식(式)이라는 말은 정작 알프스에서는 쓰지 않으며, 히말라야 같은 고소의 등반에서
비로소 그 가치가 인정된다.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소수 정예주의가 기본이고, 등반 방식은 속공(速攻)이어야
하기 때문에 으레 물량의 경량화가 따른다. 그래서 천막 없는 설동(雪洞) 작전이 등장하기도 한다.
알파인 스타일의 등반은 단독과 속공으로 가는 중요한 과정이지만, 단순한 속공과는 엄연히 구별된다. 진정한
의미의 속공의 등반은 고산 등반에서 아주 중요한 전술 개념이다. 일찍이 이반 쉬나드(Ivon Chouinard. 1938~ )는
‘등산에 있어 속도는 클라이머의 사활을 좌우한다.’고 까지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단순한 속공 등반 기록은 그러한 진정한 알파인 스타일의 속공과는 거리가 멀다. 에베레스트
속공 등반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물론 이때 클라이머가 발휘하는 주력은 놀랍지만, 마(魔)의 길목인 아이스
폴 지대를 루트 공작도 없이 남이 뚫어 놓고 만들어 놓은 길을 뛰어가다시피 한다면, 그러한 에베레스트
등반에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겠는가. 알피니즘의 이와 같은 추세는 결국 알피니즘 자체의 앞날을
예언하기도 한다.
이미 등반의 세계도 갈 때까지 갔다는 이야기며, 등반 형식이나 방법 역시 한계에 이른 셈이다.
1993년은 에베레스트 초등 40주년이 되는 해인데, 이 해 봄철에 에베레스트에는 네팔 쪽으로만 15개 등반대가
몰리고 하루에 40명이 그 정상을 밟았다. 한편 북미 최고봉인 매킨리에서도 초등 80주년을 맞아 등반 최적기인
5월 하순에 무려 500명에 달하는 클라이머의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현상은 고도의 산업화 사회가 출현하면서
고산 등반의 제반 여건이 성숙해진 데 그 원인이 있다. 이렇듯 고산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추세는 앞으로
더욱 심해질 전망이다.
나. 산의 고도와 등산가의 태도
알피니즘이 오늘날처럼 일반화 또 보편화되기 전, 알피니스트들은 준엄한 미지의 세계를 향한 도전 정신으로
무장하고 행동했다. 그 무렵 대자연은 그들의 외경과 모험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오늘날 사람들은
과학기술 문명의 위력과 혜택 속에서 본래의 자연관에서 멀리 떨어지고 있다. 이것은 알피니즘의 본도 이탈이며
알피니스트의 불행이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진정한 알피니즘과 알피니스트가 존립하려면 보다 올바른 인식과
자기 혁신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알피니즘의 세속화와 알피니스트 자신의 타락을 막아야 한다.
여기 ‘고도(Altitude)'와 태도(Attitude)'의 문제가 제기된다. 즉 고산의 높이와 등산가의 마음가짐 사이에 새로운
관계 정립이 요청된 것이다. 등산은 고도를 지향하고 추구함을 본질로 하지만, 이제 더 새록게 오를 곳이 없는
상황에서 알피니스트는 자연적 고도에서 정신적 고도로 그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흔히 등산을 육체적인 힘과
장비 발달에 따른 등반기술에 절대적 비중을 두기 쉬우나 이보다 앞서 등산가의 마음가짐이 더욱 중요하다.
그러나 알피니즘 본연의 정신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약해지고 지금에 와서는 거의 외형만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다. 편의성과 불확실성
현대 알피니즘에서 우려하고 경계햐야 할 문제는 보편화에 따르는 세속화에 있다. 문명이 자연의 베일을 벗기면서
온갖 ‘편의성(Expediency)' 을 제공해 왔고, 알피니즘 세계에 존재하는 위험성과 불안 요소를 제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알피니즘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불확실성(Uncertainty)'이 사라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될 때 알피니즘의 세계에 과연 어떤 매력이 있으며, 과연 무엇이 남을 것인가.
우리는 이 시점에서 프랭크 스마이스(Frank Smythe, 1900~1949)가 알피니즘의 편의성을, 이반 쉬나드가 불확실성의
문제를 제기했던 것을 다시 주목해야 한다. 스마이스는 일찍이 에베레스트 등반에 인공 산소 사용을 반대하였고,
고산 등반에서의 어려움과 위험함과 싸우는 것이 곧 알피니즘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등산에서 편의성 문제는
비단 인공 산소 사용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각종 장비가 개량되어 사용이 편리해지면서 등산가의 세계가 변질되고
있다. 메스너 역시 이 문제가 바로 산을 작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보고, 장비의 과도한 사용에 반대하였다.
다시 말해 제반 편의성이 알피니즘 정신을 희박하게 하고 약화시키는 것을 염려한 것이다.
한편 불확실성이야말로 등산의 세계를 이루는 매우 중요하고 필수적인 조건이다. 불확실성은 적어도 알피니즘의
초창기에는 별문제가 아니었지만 정보가 풍부해지면서 미지의 세계는 더 이상 비밀을 감출 수 없게 되었다.
전 세계 오지의 구석구석까지 속속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불확실한 것이 없어지고, 이에 따라 불안도 공포도
사리지고 있으니, 모험을 즐기는 알피니스트가 대자연 속에서의 보람을 찾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라. 등산과 인생
영국의 등산가 조지 휜치(George Finch, 1888~미상)는 ‘등산은 스포츠가 아니라 삶의 방법’이라고 했다.
등산은 외형상 의 ․ 식 ․ 주의 이동이며, 내적으로는 그 자체가 인생이다. 높은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향하여
스스로 노력하며 고생하는 그 과정은 인생과 다름없다.
프랑스의 등산가 샤뗄리우스는 ‘등산은 길이 끝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고 했는데, 여기에 등산만이 가지는
특색과 특권이 있다.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며 온갖 어려움과 싸우며 이를 극복하는 정신과 행위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등산하는 사람은 많은데 등산 서적을 읽는 사람이 적은 것 또한 오늘의 현실이다. 그런데 등산가는 선인들이
간 길을 더듬고, 언제나 추체험(追體驗)해야 한다. 정보의 홍수로 인해 미지의 세계가 없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서적을 통한 선구자와의 교감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1950년 인류 최초로 8,000m의 정상에 오른 프랑스 등산가 모리스 에르조그(Maurice Herzog, 1919~ )가 그의
저서 ‘안나푸르나 등정기’의 결론으로 한 말에서 우리는 등산과 인생의 문제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안나푸르나에 빈손으로 갔지만, 안나푸르나를 오름으로 인생에 새 장을 열었다. 인생에는 또 다른
안나푸르나들이 있다….’
미국의 등산 교본에서 ‘등산가는 산의 자유를 추구하는 자로 대자연의 시민권(Wilderness Citizenship)'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민권에는 특권과 보답도 따르지만 책임과 의무 또한 따른다.’고 했다.
알피니즘이 무엇인가 알려는 자, 그리고 알피니스트가 되려는 자는 남다른 특권과 책임과 의무가 어떤 것인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3.인맥(人脈) > ▶등산교실(山情)'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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