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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취미활동(挑戰)/▶Raido- HAM(햄送受)

타이태닉호의 비극과 무선(라디오)의 위력

by 사니조아~ 2024. 7. 13.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영화 '타이태닉(Titanic, 1997년)'이 세계 영화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바 있다. 전미 박스오피스 15주 연속 1위에 아카데미상 11개 부문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의 열연 속에서 가난한 이민자와 상류계급 여인 간에 피어난 세기의 사랑이 아름답게 그려진다. 영화의 배경과 무대였던 타이태닉호의 침몰은 1912년 대서양에서 실제 일어났던 세기의 해양 조난 사고다. 4월 14일 밤 11시 40분에 빙산과 충돌했던 타이태닉호는 15일 새벽 2시 30분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1522명의 승객이 배와 함께 바다에 희생된 해양사()에서 잊을 수 없는 비극이었다.

그런데 타이태닉호의 침몰이라는 실제 사건은 라디오의 역사와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타이태닉호의 조난이 무선을 통해 전 세계에 타전되었고, 구조 노력과 사고 소식이 무선을 통해 신속하게 전해지면서 무선의 위력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타이태닉호는 당시 최첨단이라 할 수 있는 무선통신을 장착하고 있었다. 충돌이 일어난 직후 대서양을 지나던 10여 척의 배가 타이태닉호가 내보낸 조난 신호를 수신했고, 밤안개를 헤치며 타이태닉호를 향해 달려갔다. 93킬로미터 떨어져 있던 카파티아호가 현장에 제일 먼저 도착했다. 많은 승객과 타이태닉호가 가라앉은 지 거의 두 시간이 지난 후였으나, 그래도 차가운 밤바다에서 죽음에 직면한 나머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 한편 15일 오전 1시 20분부터 세기의 조난 사고는 무선을 통해 세계에 전해지기 시작했다. 소식을 접한 대서양 해안선 일대의 무선 수신소들이 소식을 타전하면서 무선통신 전파가 혼란에 빠져들기도 했지만, 새벽녘에는 전 세계가 타이태닉 해난 사고를 접할 수 있었다(Stephen Kern, 1983). 당시 '아메리칸 마르코니 무선전신회사'에 근무하던 데이비드 샤노프(David Sarnoff, 1891~1971)는 타이태닉호의 침몰 소식을 접하고 72시간 동안 교신하면서 무선통신의 가치를 입증하기도 했다(강준만, 1992). 샤노프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마르코니 무선전신회사의 주요 임원이 되었다. 그 뒤 미국라디오주식회사(RCA : Radio Corporation of America)의 총지배인이 되어 라디오 수신기 보급에 기여했고, 텔레비전 시대의 도래를 예견하면서 NBC 방송국을 설립에 참여하고 TV의 보급과 확산에 공헌하기도 했다.

깊은 밤사이에 일어난 조난 사고와 그 소식의 전파는 무선통신의 위력을 두 가지 측면에서 실감케 했다. 하나는 무선통신 덕분에 다수의 생존자를 구조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가까이 있었는데도 잠자리에 드느라 무선을 수신하지 못한 배도 있었지만, 10여 척의 배들이 무선을 듣고 긴급하게 달려왔다. 또 다른 측면은 전 세계가 사고가 일어난 동일한 시간대에 그 소식을 접하고 경험을 공유했다는 점이다. 무선통신이 없었으면 타이태닉호와 승객 전원이 바다 속으로 사라진 후 며칠이 지나서야 세계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인식했을 것이다. 그해 4월 16일 영국 런던의 《더 타임스(The Times)》는 무선통신으로 가능해진 경험 공유의 범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상처 입은 괴물의 조난은 대서양 전역을 통해 무선전신으로 울려 퍼졌으며, 사방에서 크고 작은 선박들이 타이태닉호를 구원하려고 서둘러 왔다 ··· 우리는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으로 침몰의 고뇌에 빠진 거대한 선박을 거의(직접) 목격하다시피 했다는 것을 인정한다."(Stephen Kern, 1983, 457쪽 재인용)

 타이태닉호가 한밤중에 조난신호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라디오 장비를 모든 배에 의무적으로 구비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는 가장 우선시한다는 국제 규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1860년대 유선전신이 황금기에 접어들었을 때, 유럽 국가들은 1865년 '국제전신대회(The International Telegraphic Convention)'를 통해 전신과 케이블 운영에 대한 합의를 한 바 있다. 무선 시대를 맞이해 유럽 국가들은 다시 1903년 라디오 방송 1차 회합을 개최하고 중요한 규칙에 동의했다. 미디어는 인본주의적이며 긴급한 사용이 가장 중심이 된다는 합의를 한 것이다. 요컨대, 긴급 사건이 발생하거나 항해하는 배가 도움이 필요할 때, 우선적으로 처리한다는 의미다. 이어 1906년 2차 회합을 통해 이의 국제적 의미를 더욱 강화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10년 미국 의회는 모든 여객선에 라디오 장비를 의무적으로 구비해야 한다는 법을 만들었다(조맹기, 2004).

타이태닉호의 침몰은 그 자체는 비극이었지만, 한편으로 무선의 위력을 실감케 했고 무선 커뮤니케이션 붐을 일으켰다. 사실 타이태닉호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무선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었다. 마르코니의 무선전신 기술이 세상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이에 매료됐다. 아마추어 무선(ham operator)이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으며, 부유층들의 고급 취미활동으로 자리 잡았다. 라디오용품 전문점과 무선 마니아를 위한 전문지도 생겨났고, 책이나 잡지에서도 무선에 대한 지식을 제공했다. 아마추어 무선 애호가들은 서로 교신하면서 무선에 대한 지식을 공유하는 한편 정보 교환의 네트워크도 형성했다. 이들의 활동은 때로는 긴급 상황을 누구보다 빨리 전파하기도 했다. 하지만 해군이나 상업적 무선국의 활동에 끼어들기도 했는데, 이는 아마추어 무선을 규제해야 한다는 요구를 낳기도 했다(요시미 순야, 1995).

예컨대 타이태닉호의 조난이 있기 전인 1909년 1월 23일, 북대서양 낸터킷(Nantucket) 해상에서 리퍼블릭호와 플로리다호 두 선박이 짙은 안개로 충돌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리퍼블릭호 무선기사의 구조신호와 이를 연계한 아마추어 무선기사들의 노력으로 두 선박에 탑승했던 1200여 명 거의 전원이 구조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많은 젊은이들을 아마추어 무선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반면, 타이태닉호 침몰 당시 아마추어 무선기사들에 의해 '타이태닉호 모든 승객은 안전, 항구로 예인 중'과 같은 허위 정보가 전송되어 구조에 혼선을 빚기도 했다(Susan J. Douglas, 1999). 이를 계기로 미 해군이 강조해 오던 아마추어 무선 규제 주장이 힘을 얻게 됐다.

무선에 대한 교통정리가 필요했고, 1912년 미국 의회는 '라디오법(The Radio Act)'을 제정했다. 타이태닉호가 침몰된 지 4개월 후였다. 라디오법은 라디오의 사용을 원하는 사람은 승인을 받도록 했고, 아마추어 무선 주파수대를 규제했다. 또한 상업적 무선과 해군의 무선을 송수신하지 못하도록 했다. 반면 신청 기준에 합당하면 아마추어 누구든 무선통신업자 허가를 발급받을 수 있도록 했다. 라디오법은 결과적으로 합법적 무선국의 확산을 가져왔다. 미국에서는 1913년 322개, 1916년 1만 279개, 1917년 1만 3581개로 무선국이 급증했다. 여기에 무면허까지 합치면 1917년 무선국이 15만 개 이상이었던 것으로 추정됐다(요시미 순야, 1995, 243쪽).

아마추어 무선의 확산은 라디오 시대를 향한 사회적 자양분이 되었다. 이들은 탐색적 라디오 청취로 1910년대 라디오 방송의 수용자를 형성했다. 비록 음성이 아니라 무선전신 형태로 진행되기는 했지만, 무선을 통한 교류와 네트워크를 만들어 나갔다. 이를 토대로 무선(wireless)이라는 용어는 라디오(radio)라는 개념으로 대치되어 갔다. 그리고 아마추어 무선 애호가들의 호응은 페센든과 포리스트의 라디오 방송 실험을 자극하기도 했다

혁명, 2013. 2. 25., 커뮤니케이션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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