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10.2.7(일) 오전10:00~
장소: 양산사 화북면 통도사 극락암
제목 : 극락암 정기법회 참석 명정큰스님
후기 : 지난주에 이어 극락암 점심 산채나물 비빕밥도 생각나고 반야암을 가려다가 극락암으로 올랐다.
상좌스님께서 목탁을 치며 기도를 하면서 관세음보살 정근을 주문 하셨다.
와이프랑 같이 동행을 했는데 컨디션이 좋질 않아 극락암에 가질 않는것을 잘 설
득하여 함께 했다.
평풍처럼 잘 조화를 이룬 암자이며 뒤편 소나무가 정말 장관이시다....
극락암 하면 오래된 사찰암자로 우리 나라 경봉스님께서 머불었던 곳으로 이름이 나와 있으며 특히
오래동안 명정스님깨서 경봉스님을 모셨든 곳으로 특유의 미소를 가지고 법문에 임 하셨다.
경봉 스님의 유품으로 당대의 선지식들과 서간으로 선문답을 주고받았던 편지와 66년간 기록한 일기는 몇 가마니가
되었다. “한 삼년 동안 두문불출하고 초서체로 쓰여 진 스님의 글을 파고들었지. 내 책상 앞이 둘러 꺼졌어. 이걸
어떻게 풀이를 해야 하나 이게 무슨 뜻인고, 의자에 앉아 꽤나 끙끙거렸지.” 명정 스님은 불가뿐만 아니라 나라
안에서도손꼽힐정도로 초서 번역에 아주 능하다. 경봉 스님은 일찍부터 명정 스님의 한문 실력을 간파했다
. 경봉 스님께서 어느 날 다른 절의 낙성식 글을 읽어보라고 했다. 그때 명정 스님이 덧붙인 몇 마디가 스승을 놀라게
했으며, 이런 일이 몇 번거듭되면서 상좌의 글 솜씨며 한문 실력을 인정했다.경봉 스님은 당신의 책과 일기 등 책갈피
안쪽마다 ‘증 명정선자贈 明正禪子)’라는 글과 함께 게송까지 덧붙여 남겨놓았다. 명정 스님은 은사 스님의 뜻을 받들어
<경봉 스님 말씀>, <경봉 일지>를 비롯하여 당대의 선지식들과 주고받은 서한집 <삼소굴 소식> 등을 출간했다.
유난히 기록을 꼼꼼하게 했던 경봉 스님의 글들이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명정 스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경봉 스님의 고졸하고도 담백한 문장이 명정 스님의 손끝에서 번역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극락암의 수행 가풍과 선향을 맛보게 하였으며, 몇몇 사람들은 출가의 길을 걷게 되는 인연을 지었다.
차를 우려내는 명정 스님의 손길은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다. 그런데 스님의 말씀은 286컴퓨터처럼 더 느릿느릿하다. ‘이 산중까지 와서 객진번뇌(客塵煩惱)와 급한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면 언제 마음공부 할라나?’ 그런 일갈로 받아
들이기로 했다. “은사님은 뜻이 통하고 말귀를 알아듣는 눈 밝은 납승이 찾아오시면 ‘시자야, 염다래(拈茶來) 하라.’고
일러셨어. ‘차 다려오라’는 말인데 그것이 그렇게 멋스럽게 들리데. 동도동격(同道同格)의 눈 열린 이에게 최상의
대접은 일완청다(一椀淸茶)지.” 명정 스님은 눈 밝은 이, 눈 어두운 이를 가리지 않고 누가 와도 차 한 잔을 내놓으니
조주스님의 청다
(淸茶)고사를 떠올리게 한다.
명정 스님은 극락암에 붙박이처럼 있으면서 경봉 스님의 시자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안거철이 되면 걸망지고 선방을 오갔으며 그런 운수납자의 생활이 40여년이 넘는다. 명정 스님께서 한 마디 툭 던지는 말씀이 바로 선어가 되고 선시가
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사요소요(師了燒了)라. 죽어서 화장막에 가서 태워 버리면 한 줌의 재가 되리니 너의 주인공은 어느 곳에 있는가? 선종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 그래서 선은 학문일 수 없고, 오히려 이지(理智)가 침몰된 뒤부터 시작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어느 선원에서 경봉 스님께 ‘영산회상의 꽃을 들어 보인 도리’와 ‘조주의 앞니에 털이 난 것’ 그리고 ‘서산의 고기에
뿔이 난 도리‘를 물어왔다. 여기에 경봉 스님께서는 이렇게 답하였다.
몇 군데나 이렇게 물었나/ 일구(一句)도리를 해결하지 못했구나/ 고인들이 씹던 지게미를 탐하지 말라/ 보검으로는 송장을 베지 않노라/ 미소(?)
“옛 도인들은 한 가지 이치로 넉넉하게 통하는 도리를 즐겼던 분들인데, 그 도인들이 씹던 지게미를 가지고 번거로이 묻는 것은 허물이 크다는 말씀이지. 실제로 자기가 수행을 해서 어떤 경지를 얻으면 구태여 말을 궁리해가며 선문답을 할 필요
가 없어. 이 도리는 말이나 글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설사 그렇게 알았다 하더라도 한 푼어치도 필요가
없는 것이야.” ........................
극락암에 오면 고즈넉한 산사의 풍광에 반하게 되고 어쩐지 참선이나 명상수행을 통해 도인이 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그러면 사람들은 명정 스님께 불쑥 묻는다. “바쁘고 분주한 일상생활 가운데 정신집중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요.
그 방법이 있습니까?” “조선시대 선조 때의 청매 조사는 고요한 산중 선방에서 나와 일부러 시끄러운 장터로 공부하러
다녔어. 사람들이 붐비는 장바닥 한 구석에 앉아서 공부를 하는데 공부가 순일하게 잘 되면 ‘오늘은 장을 참 잘 보았구나’
하고 공부가 잘 되지 않는 날이면 ‘오늘은 장을 잘 못 보았구나’하며 자기의 공부를 점검했어. 청매 조사는 앉으나 서나
오나가나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참선을 했지.”
인간의 업식(業識)은 수만 년 열심히 본능적으로 그 밑 빠진 독을 채워 왔기에 그 업식을 바꾸려면 극심한 고통을 맛보지 않으면 안 된단다. 힘들고 잘 안 되는 일일수록 집중적으로 반복해서 단련하는 데 진정한 묘미가 있는 것이란다. 명정
스님은 말미에 “그렇다고 참선이 아주 어려운 것도 아니고 아주 쉬운 것도 아니야. 참선은 우리의 생명 그 자체지”라고
덧붙인다.
“사람은 옹골 찬 신념이 있어야 해. 신념이라는 것은 행선지요, 표지판이야. 만약 행선지가 없는 차(車)라면 얼마나 우습겠는가. 얼마나 무모하게 헤매고 다니는지를 생각해 보면 행선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지. 그래서 이 신념이란
진리의 이상향으로 향해서 가는 원동력인 것이야.”
산중에 계시지만 산 아랫동네의 소식을 훤히 꿰고 있는지라, 명정 스님은 민중들의 삶이 어렵다는 소식에 가슴 아파하셨다.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 평소의 마음가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아야 해. 마음에 따라 거지도 되고 왕자도
되며 생각에따라 지옥과 천국이 판이하게 벌어져. 희망에 부풀어 밝게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살아가며
생각하는 발상부터 무언가 다르고 차이가 나지. 아무리 역경에 처해 있더라도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참고 견디어
밝은 희망을 가슴에 안고 있으면 머지않아 축복이 오리라는 신념을 지니고 살아야지. 하루 종일 퍼붓는 소나기는 없으니까.”
경봉 스님은 극락암에 왔다가 내려가는 사람들에게 “대문 밖을 나서면 돌도 많고 물도 많으니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도 말고 물에 미끄러져 옷도 버리지 말고 잘들 가라.” 는 말씀을 하셨다. 명정 스님은 “마음속으로 밝고도 원만한 생각을
지닌다면 거기가 바로 극락인 것이니, 다시는 극락암을 찾지 말라”고 이르신다. 스님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세요.
산목련 꽃향기를 들으러 와야지요. 향기 소리 깊은 곳에 차 한 잔 마시러 와야지요.
명정 스님 약력 1959년 해인사로 출가, 1960년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 스님의 시자가 되었다. 1961년 경봉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5년 비구계를 수지했다. 이후 40년 넘게 운수납자(雲水衲子)로 평생을 참선 수행에 전념해 왔다. 현재 영축총림
극락선원 선원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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