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NG>손발 흙 묻히는 ‘노동 수행’은 ‘필수’
선방에서 졸면 “밥값 내놔라” 불호령
봉암사 백운암은 희양산의 그 단단한 바위의 턱 밑에 있습니다. 따라서 그 곳까지 오르기 위해선 경사진 비탈길을 숨을 할딱이며 치고 올라가야 하지만, 일단 ‘백운(白雲·흰 구름)’이 머무는 암자에 이르면 한 마리 학이 되어 날 것만 같은 기분이 됩니다. 멀리서 보았던 그 단단한 흰 바위가 바로 눈앞에 펼쳐져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고 있어서 마치 자신이 그 보석이 된 것도 같습니다. 바로 그 자리의 백운암은 딱 벌어진 거인의 어깨 위에 한 마리 학이 사뿐히 앉아 있는 것만 같습니다.
학은 천년을 사는 영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돼지처럼 잠자고, 거위처럼 먹어 살이 쪄 뒤뚱댄다면 그 고결한 본래의 자태와 성품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었겠습니까.
손수 꿀 치고, 채소 가꿔 대부분의 먹거리 자급자족
10여 년 전까지 이곳에서 홀로 살던 호연 스님은 날다람쥐처럼 날아도 30~40분은 걸릴 봉암사까지 공양 때마다 내려갔다가 올라왔습니다. 그는 매번 빈 지게를 지고 산 아래에 내려갔다가는 공양을 하고, 봉암사 부근에서 나무를 한 짐해선 지게에 지고 그 험한 비탈길을 올라왔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이 자동차에 의지해 걷지 않고, 갈수록 손발조차 움직이지 않으며 기계에 의존하면서 편리함에 온몸을 점차 의탁하고 있을 때 그는 왜 굳이 아래에서 나무를 해 그 정상까지 지고 가는 몸의 고행을 자처했던 것일까요?
그만이 아니었습니다. 봉암사 뒤 희양산 깊은 산골에서 토굴살이를 하는 용추토굴의 종명 스님도, 월봉토굴의 월봉 노스님도 손수 꿀을 치고, 채소를 가꾸고 대부분의 먹거리를 가꿔 자급자족했습니다.
봉암사가 1년 내내 산문을 폐쇄하고 참선 정진하는 조계종의 유일한 종립특별선원이긴 하지만 이들이 놀고, 먹으며 참선 수행만 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아마 한국 불교계에서 봉암사 스님들만큼 몸으로 일을 하는 스님들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봉암사 아래에 있는 수 만평의 밭을 선원의 선승들이 직접 가꿔서 상당수 먹거리를 스스로 해결하고 있습니다
그만이 아니었습니다. 봉암사 뒤 희양산 깊은 산골에서 토굴살이를 하는 용추토굴의 종명 스님도, 월봉토굴의 월봉 노스님도 손수 꿀을 치고, 채소를 가꾸고 대부분의 먹거리를 가꿔 자급자족했습니다.
봉암사가 1년 내내 산문을 폐쇄하고 참선 정진하는 조계종의 유일한 종립특별선원이긴 하지만 이들이 놀고, 먹으며 참선 수행만 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아마 한국 불교계에서 봉암사 스님들만큼 몸으로 일을 하는 스님들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봉암사 아래에 있는 수 만평의 밭을 선원의 선승들이 직접 가꿔서 상당수 먹거리를 스스로 해결하고 있습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동안 먹지도 않는다’ 규약 1947년 성철, 청담 스님 등이 봉암사 결사를 단행 할 때부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동안 먹지도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일일부작 일일불식)는 것은 이들의 가장 기본적인 규약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그렇게 일을 하다 지쳐서 선방에서 졸기라도 할라치면 “밥값 내놔라!”는 성철 스님의 멱살잡이에 선승들은 마루 밑으로 저만치 나둥그러지곤 했습니다.
또 조계종 종정을 지냈던 서암 스님(1917~2003)은 오늘날 봉암사를 일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979년 봉암사 조실에 추대된 이래 80~90년대 봉암사를 이끌었던 스님은 언제나 자신의 빨래를 손수 했고, 노구의 몸임에도 택시를 타고 절에 들어오는 법이 없었습니다. 꼭 먼 길을 걸어 나가서 완행버스로 읍내에 도착한 뒤 다시 시외버스에 몸을 싣고 대구까지 갔다가 서울까지 통일호 열차를 타고 갔습니다. 노구의 그에게 그만 새마을 열차를 타라고 하면 “통일호 열차는 눕고 싶어도 누울 수 없으니 허리를 곧추 세운 채 참선하기 그만이고, 서서히 가니 산천경계를 구경할 수 있어서 더 할 나위 없이 좋은데, 거기다 돈까지 적게 받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했습니다. 저도 서암 스님이 열반하시기 전 몇 차례 뵌 적이 있습니다. 말과 행동의 차이를 찾아보기 어려운 그런 진실한 분을 다시 만나보기가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봉암사의 주지 함현 스님이 심장수술을 받을 만큼 좋지 않은 건강상태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절 살림을 하는 것도 그런 서암 스님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체득한 때문입니다.
선방 대신 공양간으로 들어가 한 철 동안 부엌데기로 수행 이곳에선 선방에 앉아 있는 것만이 수행이 아닙니다. 예부터 어묵동정(語默動靜·말하건 침묵하건 움직이건 멈춰있건)간에 수행을 중시해온 선가에선 한 마음을 쉬면 시장 바닥에서도 고요할 것이요, 마음을 쉬지 못하면 깊고 깊은 심산에서도 요란하기 그지없다고 했습니다.
이곳 봉암사에서 오랫동안 수행했던 수경 스님(화계사 주지)이 몇 년 전 최고 고참임에도 불구하고 후배들을 위해 자신은 선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대신 공양간으로 들어가 한철 동안 부엌데기를 자처해 장작불로 밥을 해서 선승들을 ‘시봉’한 적이 있습니다. 그에겐 장작을 때는 것이 바로 수행이었을 것입니다. 한국 불교계의 대표적인 실천운동가로서 막사이상을 받기도 했던 정토회 지도법사도 젊은 시절 한때 머리를 기르고 봉암사에서 불목하니(절 머슴)로 일하면서 선방이 아닌 머슴으로 수행한 적이 있습니다. 어찌 일이 앉아서 좌선하는 것보다 더 수행이 되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만약 앉아야만 수행이 된다면 저 무정물들인 바위를 따를 자가 없을 것이며, 그것은 활발한 ‘선가(禪家)’가 아니라 ‘상가(喪家)’일 것입니다.
자급자족 승가공동체 꿈꾸며 옻나무 수백그루 무럭무럭
함현 스님은 암자에 오르는 길에서 용곡 상류 봉암사 깊은 산골에 어머니 품 같은 분지가 나오자 이곳에서 완전한 자급자족 선승 공동체를 일구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깊은 봉암사에서도 1~2십 리는 더 들어가는 깊은 산골에 외부와는 차단된 곳에 선방을 지어 자급자족 승가공동체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곳엔 스님들이 자급자족의 기반을 닦기 위해 심어놓은 옻나무 수백그루가 가득했습니다. 봉암사의 경제력이 미치지 못해 그런 꿈을 실현시키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 옻들을 바라보는 함현 스님의 눈은 꿈 많은 소년처럼 푸르렀습니다.
높고 높은 산을 오르내리니 몸은 고단하지만 정신은 더욱 더 성성히 깨어났습니다. 몸의 편리만을 추구하면서 영혼과 정신마저 잃어버린 이들에게 날다람쥐처럼 산을 달리며, 머슴처럼 흙을 파는 선승들의 손발에서 일심의 고요가 흐릅니다. 누가 반농반선(半農半禪·절반은 농사짓고, 절반은 참선)이라 했던가요. 선가에선 전농전선(全農全禪·앉아 있을 때는 참선할 뿐, 일할 때는 오직 일할 뿐)이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