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아버지의 라듸오
김해수지음 / 김진주 엮음
16.11.15
난 이 책을 울산교보문고에서 책을 발견했다.
바로 현장에서 구매 했다.
시절에 대한 내용이 전부 이해가 되는 부분이라
뒤도 안 돌아 보고 구매 했여 그 책을 집에서 다 읽었다.
그것도 언드라인을 긋고 메모해 가며 아주 감명
있게 우리나라 라듸오 역사를 이해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전자공학을 이해 하는 학교 대학교는
그이 없었지만 나름 김해수 선생님은 일본에서
그 전자 공학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며 그 글을 쓴이는
김진주님이시다. 아래 유튜브 자료가 2점이 링크를 해
났습니다.
독특한 마음으로 열정을 다 하신분으로 기억이 납는다.
아버지’는 만인이 사용하는 동등한 호칭이지만 그 뜻은 만
가지 ‘희로애락’을 품고 있는 것 같다. 책 제목이 ‘아버지의
라디오’이다. 책은 돌아가신 아버지 김해수 삶의 이력을
딸 김진주가 정리해 출판한 것이다.
김해수는 금성사에서 국산라디오 1호를 만든 1960년대
대한민국 근대화 산업을 이룩한 엔지니어이다.
딸은 산업화시대 아버지의 삶과 반대의 길을 걸었다.
이화여대 약학과 재학 중 민주화시대를 주장하고 활동한
딸 김진주의 남편은 얼굴 없는 시인으로 알려진 박노해이다.
# 김해수 이야기 1 : 금성사 입사
1958년, 김해수는 신문광고에 럭키화학공업사에서
‘고급 기술간부 모집’ 광고를 보고 응시했다. 지원자 2000명,
서류심사를 거쳐 필기시험 자격 83명, 이 중 7명이
뽑혀 실기시험을 보았다. 회로도를 그리는 문제가 나왔다.
이불을 덮어 쓰고 라디오를 분해·조립하고 만든 경험으로
볼 때 대학생에게 구구단 외우고 답하는 것처럼 너무 쉬웠다.
그리고 최종 합격자는 총 3명이었다. 시험에 합격한 후
첫 출근날, 구인회 사장이 국산라디오 1호 전담 설계를
직접 지시했다. 입사 후 라디오 설계와 관련된 모든 일은
내가 주도해서 진행했는데, 약 1년 후인 1959년 8월에
금성 A-501의 시제품이 완성돼 11월 15일 국산 라디오의
출시가 이루어졌다. 초기 생산량은 87대 정도였고
가격이 2만환이었다.
내가 금성사에서 받은 첫 월급이 6000환이었으니 결코
싼 가격은 아니었지만, 그때 시중에서 3만3000환에
거래되던 미제 라디오에 비하면 훨씬 저렴한 편이었다.
당시 국제신보 1959년 11월 4일자에 ‘국산 라디오 등장’이란
기사가 보도됐다. ‘금성 A-501 국산 라디오는 기술 수준이
외국제품에 비해 손색이 없고 값도 싸다 …. 처음부터 국산
부품을 60%나 사용한 것은 기록될 만한 일이다
’ A-501, A는 AC Alternating Current 교류의 약자이다.
5자는 5구식 진공관, 01은 제품 1호 의미이다.
# 김해수 이야기 2 : 박정희 대통령 만남
라디오 국산화는 여러 가지 문제로 어려움에 직면한 상태가 계속됐다.
설상가상으로 1961년 5·16 이후 부정축재 기업가 구금 등 정국은
불안정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판매가 되지 않아 공장이 가동을 거의 멈춘 상태인 1961년 여름,
부산 연지동 금성사 라디오공장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방문을 했다. 마침 임원이 외출 중이라 생산과장인 김해수가
현황을 설명했다.
공장을 둘러본 후 박정희 의장이 “김 과장, 어떻게 하면 한국의
전자산업이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소?” 하고 질문을 했다.
이에 김해수 과장은 “광복동 라디오 가게 진열장에 가면
외제 라디오 박람회장입니다.
국산 라디오는 단 1대도 없습니다, 밀수품의 유통을 막아야
우리나라 전자산업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일주일 후 밀수품근절에 관한 최고회의 포고령과 전국 농어촌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 정책이 발표됐다. 라디오 판매 부진 영향으로
폐업까지 검토한 금성사는 다시 회생하는 계기가 됐다.
# 김해수 이야기 3 : 카멜레온 라디오
필자도 1970년대 나만의 전용 라디오를 하나 구입했다.
‘메아리’라는 브랜드가 기억에 떠오르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자기 몸보다 더 큰 배터리(건전지)를 등에 업고 노란 고무줄로
칭칭 매어진 라디오를 가끔은 창문틀에 보관하기도 했다.
몇 개월이 지난후 배터리 교체를 하려고 하니 라디오 케이스
부분과 고무줄 매어진 곳의 색상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금성사 A-501 라디오는 외형 플라스틱 케이스를 연한 회색,
미색, 분홍색, 하늘색, 연록색, 신혼부부용, 학생용, 거실용 등
다양하게 구분하여 판매했다.
라디오 판매 소매점은 큰 유리장 넘어 진열장에 라디오가 잘
보이게 전시를 했다. 정오 무렵이면 진열장에 전시된 라디오는
햇빛에 의해 직접 노출이 된다. 천으로 유리창을 가려두는
가게도 있다.
장시간 그대로 두면 햇빛을 받은 라디오 위쪽은 하얀색으로
변하고 아래쪽은 그대로이다. 즉 색이 옅어지거나 바래진 것이다.
하루 종일 햇빛에 노출했더니 뜻하지 않은 이중컬러색이 되었다.
이것을 ‘카멜레온 라디오’라 했는데 기술 부족에서 발생한 부끄러운
이야기이다. 회사는 전량 수거해 파기한 사례도 있었다.
# 금성사 라디오 문화재가 되다
책 속의 내용이다. ‘딸(김진주)은 아버지(김해수) 원고를 정리하면서
아버지가 직접 설계하고 제작한 금성 A-501 라디오를 찾아 나섰다.
진품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다 했다. 전국에 3~4대
있지만, 가격도 수천만원 호가할 정도이며, 딸이 그 소중한 유품
하나 간직하지 못해 안타까워했다.
팔려는 사람도 없고 제조사인 LG그룹도 모조품을 전시해 놓았다고
한다.’ 금성사가 최초로 만든 A-501 라디오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등록문화재 제559-2호’가 됐다.
# 창원에 있는 민속 박물관
필자가 사는 창원에 민속박물관이 2군데 있다. ‘창원민속박물관’과
‘김씨네 박물관’이다. 두 분의 박물관장은 사비를 들여 수집한 1960년대
생산된 전자제품과 생활용품외 일제강점기 교과서도 전시하고 있었다.
전시장의 시설유지가 개인 예산으로는 한계가 있어 조금 아쉽다.
지방자치단체나 공공기관에서 관심을 가져 우리 시민의 것, 도민의 것,
나아가 대한민국의 역사 전시장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진다.
# 경남에 대한민국 기업사 박물관 설치
필자는 공기업 관광본부장 재직시 진주 지수초등학교 폐교 부지에
‘대한민국 기업사 박물관’을 건립하자고 언론과 세미나에 참석해 여러
차례 주장했다. 건국 이후 대한민국 기업이 만든 제품을 연도별로
세세하게 진열한다.
전시장은 그 시대를 살면서 실제 제품을 사용한 분에게 주는 유·무형의
생산적인 추억과 기억외 우리 후손에게 전해질 지적가치는 우리 사회
전체에 소중한 공공의 자산이 될 것이다.
머지않아 이런 박물관이나 전시관이 많이 건립될 것으로 기대한다.
지금 건립하면 100이 소요된다고 가정할 때 5년, 10년 후 설립시는
200, 300으로 기하급수적으로 예산이 증가할 것이다. 반면 보존
제품은 갈수록 숫자가 줄어들 것이다. 김해수의 딸도 “세월이 흘러
진품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렵다” 했다.
김해수 이야기 4 : 아버지의 눈물
‘아버지의 라디오’ 책 속의 마지막 문장이 가슴을 울린다.
김해수는 1979년 대통령산업포장을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해 10·26으로 서거했다. 1991년 봄, 딸과 사위 박노해가
민주화투쟁으로 감옥에 가게 됐다.
이 소식을 접한 아버지 김해수는 거실 한가운데 자랑스럽게 걸어
두었던 대통령산업포장 액자를 거두어 책상 서랍에 살며시 넣었다.
‘아버지의 라디오’를 지은 김해수 딸 김진주 약사님은 거제의
약국에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구인회의 한마디> 친구를 한 번 사귀면 헤어지지 말고
오래 사귀어라. 부득이 헤어지더라도 적을 만들지 말라
<그림> 국산 라디오의 시대를 연 김해수와 그의 자전적 회고인 ≪아버지의 라디오≫
흥미롭게도 국산 라디오가 처음 개발된 공간은 부산이었다.
최초의 국산 라디오인 A-501은 1959년에 금성사(현재의 LG전자)
에 의해 출시되었는데, 당시에 금성사의 본사가 부산시 연지동에
있었던 것이다.
현재 그 자리에는 청소년 과학체험관인 LG 사이언스홀이 설치되어 있다.
기술에는 좌익과 우익이 없다
김해수는 1923년에 건어물 교역상을 하던 김종옥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출생지는 경남 거창이었지만 3살 때 이사하여 하동에서
자랐다. 김해수는 1937년에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갔다. 그는
갑종 중학교인 릿쇼(立正)학교를 다닌 후 1940년에 동경고공(東京高工)의
전기공학과에 입학했다.
1943년 봄에 김해수는 인천 조병창의 전기주임으로 갑작스런
발령을 받았다. 태평양전쟁에서 열세에 몰린 일본 군부의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조병창에 부임하자마자 그곳을
탈출해서 강원도 산골로 숨어들었다.
다행스럽게도 김해수는 강원도 금화군에 있던 창도(昌道)광산의
전기주임으로 일할 수 있었고, 후지모토(藤本) 소장의 도움으로
인천 조병창에서 도주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김해수는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에 고향인 하동으로 돌아왔다.
그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라디오 가게를 헐값에 인수하여 창전사
(創電社)라는 간판을 내걸고 일을 시작했다. 김해수는
불량 라디오들을 척척 수리해냄으로써 경남 일대에서 스타
엔지니어로 떠올랐다.
김해수에게는 강대봉이라는 오랜 친구가 있었다. 강대봉이 좌익
성향을 지닌 민주청년동맹(민청)의 지도자 격이었기 때문에 김해수는
민청이 주도하는 집회나 공연에 필요한 무대장치를 설치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민청에 대항하는 우익 단체인 민족청년동맹(족청)으로부터
동시에 협조요청을 받아 가끔은 그쪽 일을 거들어주기도 했다.
김해수는 어느 편이 됐든 기술적 서비스는 공평하게 제공하는 것이
엔지니어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1947년에 김해수는 3명의 친구들과 함께 좌익 청년활동의 핵심으로
몰려 소위 ‘하동군청 방화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됨으로써 모진
시련을 겪었다. 김해수는 끝까지 버텼으며, 결국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고문 후유증으로 얻은 폐결핵 때문에 고향을 떠나 전남
완도군에 있는 소안도에서 요양을 했다.
1950년 9월에 부산으로 거처를 옮긴 김해수는 화평전업사(和平電業社)를
개업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는 1954년 3월에 강대봉의 동생인
강강자와 결혼식을 올렸으며, 1955년 8월에는 첫 딸인 김진주를 얻었다.
그러나 전축공장 등의 새로운 사업을 벌였다가 큰 실패를 맛보았고,
설상가상으로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었다. 1956년에 그는 늑골
절제수술을 받았으며, 한쪽 폐를 더 이상 쓸 수 없는 상태로 평생을
살아야만 했다.
국산 라디오가 개발되기까지
1958년 가을에 김해수는 락희화학공업사(현재의 LG화학)가 새로
설립한 자회사인 금성사의 광고에 접하고 지원을 결심했다.
<고급 기술 간부 모집>이라는 광고였다. 그때 몰려든 응모자들은
무려 2,000명에 달했는데, 최종 합격자는 김해수를 포함해서 3명이었다.
그 중 수석 합격자이자 실무경험이 가장 많은 김해수에게 금성 A-501호
라디오를 설계하는 책임이 맡겨졌다. A-501 중에 A는 교류
(Alternating Current, AC)의 첫 글자에서 따왔고, 5는 5구식
진공관 라디오라는 의미였으며, 01은 제품 1호를 뜻했다.
<그림> 최초의 국산 라디오에 해당하는 금성 A-501호 라디오
오늘날 LG그룹의 모태가 된 락희화학은 1947년에 부산에서 설립되었다. 락희화학은 화장품 사업과 치약 사업에서의 잇따른 성공을 바탕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학업체로 성장했다. 일명 ‘동동구리무’로 불린 럭키크림과 국내 최초의 튜브형 치약인 럭키치약은 전국 곳곳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구인회 사장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화학제품을 넘어 전자제품으로 눈을 돌렸다.
구인회는 1957년에 금성합성수지공업사(1958년 11월에 금성사로 변경됨)를 설립하여 라디오 국산화를 추진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미군 PX를 통해 산뜻한 외제 라디오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아무런 경험도 없는 상황에서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윤욱현 기획부장을 비롯한 찬성론자들은 라디오 케이스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자체 기술로 감당할 부분이 적지 않으며, 핵심 기술은 외국에서 유치하면 된다고 맞섰다.
결국 1958년 4월에는 윤욱현을 주축으로 전자기기 생산공장 건립안이 마련되었고, 금성사는 라디오 국산화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라디오 생산을 위한 시설을 도입하기 위해 8만 5,195달러의 예산이 책정되었으며, 기술고문 겸 공장장으로는 독일인 기술자 헨케(H. W. Henke)가 선임되었다. 그런데 헨케는 기계공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전기공학에 대해서는 기술적 한계를 드러냈고, 실무를 주도했던 김해수와 다툼을 벌이다 결국은 금성사를 떠나고 말았다.
국산 라디오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참고 모델로 삼은 것은 산요 라디오였다. 헨케가 주장한 독일제와 김해수가 제안한 일본제 중에서 후자가 선택된 것이었다. 금성사의 기술진은 산요 라디오를 분해하고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라디오에 대한 기술을 익혔고, 필요한 경우에는 일본의 기술자들에게 접촉하여 관련 정보와 지식을 얻어냈다. 이처럼 후발 기업이나 후발국이 완성품을 출발점으로 삼아 기술을 학습하고 개발하는 방법은 ‘역행 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으로 불린다. 마침내 김해수가 주축이 된 금성사 기술진은 1959년 8월에 국산 라디오 1호의 시제품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최초의 국산 라디오 금성 A-501은 1959년 11월 15일에 출시되었다. 그 해 생산량은 87대, 가격은 2만환이었다. A-501의 가격은 금성사 대졸 사원의 3달치 월급에 해당했지만, 미군 PX에서 흘러나온 외제 라디오에 비해서는 약 2/3에 불과했다. 당시에 김해수는 라디오 캐비닛에 대한 디자인은 물론 금성사의 상징인 왕관 모양의 샛별 마크와 ‘Gold Star’ 로고까지 창안하였다. 세부적인 디자인은 서울대 미대 회화과 졸업반이던 박용귀가 맡았는데, 그는 우리나라에서 공업디자인을 개척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라디오 보급의 길을 터준 박정희
금성사는 A-501에 이어 2~4개월의 간격을 두고 7종의 추가 모델을 잇달아 출시했다. A-401, B-401, A-502, A-503, TP-601, T-701, T-702이 그것이다. 그 중에 A-401은 A-501을 간소하게 만든 것이었고, TP 혹은 T는 트랜지스터를 사용한 라디오를 의미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델들은 A-503을 제외하고는 모두 2~5개월 만에 단종되고 말았다. 제품의 성능이나 사양이 수입 라디오에 비해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림> ≪동아일보≫ 1960년 11월 27일자에 실린 A-503에 대한 광고
국산 라디오를 생산하고 보급하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연관 산업의 기술수준이 워낙 취약한 탓에 부품의 불량이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켰다. 더구나 일본과 미국에서 유입된 밀수품이 범람하고 있어 국산 라디오에 대한 반응은 냉담했다. 당시 금성사 생산과장이던 김해수는 영업 업무까지 맡아 전국을 돌아다녔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금성사의 라디오 공장에는 재고가 수북하게 쌓여만 갔다. 당시의 재고창고 안에는 반품으로 처리된 라디오 박스가 무려 2,000대나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금성사가 계속해서 적자를 기록하자 “락희화학이 번 돈을 금성가가 다 까먹는다.”는 여론도 생겨났다.
이러한 난관을 타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박정희였다. 1961년 가을에 부산 연지동의 금성사 라디오 공장은 거의 가동을 멈춘 상태였는데,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맡고 있던 박정희가 예고도 없이 공장을 방문했던 것이다. 김해수는 라디오 생산현황을 상세히 보고하면서 밀수품의 유통을 막아야 우리나라 전자산업이 살아날 수 있다는 점을 역설했다.
박정희의 라디오 공장 방문을 계기로 상황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밀수품 근절에 관한 최고회의 포고령>을 선포했으며, 공보부 주관으로 전국의 농어촌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전개한다는 발표가 잇따랐다. 그때부터 국산 라디오는 날개 돋친 듯 팔리기 시작했다. 농어촌에 라디오를 보급함으로써 군사정변에 대한 지지기반을 확대하고자 했던 박정희의 의도와 국산 라디오를 통해 한국의 전자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금성사의 요구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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