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21.12.29수) 20:30
대상 : 길상사
두달전 삼동서가 모여서 긴긴밤을 짖세우며 이른 저런 이야기를 하던
끝에 서울 성북구에 길상사에 대한 문학적인 토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그것 보다 '귀천 천상병' 시인 이야기가 있었고
그와 관계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귀천 천상병이야기는 뒤에 이야기 하기로 하고 중략~
공덕주 김영한(1916~1999)은 가난 때문에 팔려 가다시피 만남
남편과 사별한후 기생이 되었다.
김영한은 말년에 길상사 시주와 시인 백석과의 일화로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유명세를 얻게 된다.
김영한은 자신이 시인 백석과 연인이었다고 주장했으나
백석 측은 부인, 문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백석 연구가
송준은 "생전의 김영한을 인터뷰" 했는데, 의구심이 든다.
백석이 유명해지니 관계를 인위적으로 만들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했고, 백석 전문가인 이동순 영남대교수 역시
"백석과 김영한의 사랑은 실제가 아니며, 조작되고
윤색된 이야기"라고 기고했다.
김영한은 승려 법정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1987년 법정스님에게
요정 터 7,000여 평과 40여 채의 건물을 시주하니 절을 세워달라고
간청하였다.
법정은 처음에 사양하였으나, 결국 1995년 이를 받아들여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의 말사로 등록하여 길상사를 세웠고,
이전 길상사의 창건 법회에서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길상사가 백석의 거주지로 알려졌으나, 이는 백석 연구가인 송준이 백석의
일본 아오야마가쿠인 유학 시절 3학년 시기의 주소를 길상사 1875
번지에서 살았던 것으로 잘못 추정했기 때문이며, 아오야마가쿠인대학
학적부와 동창회부를 통해 정확한 주소가 다시 알려졌다.
김영한이 길상사라고 절 이름을 지은 것은, 자신과 백석과의 관련성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당시 시가로도 1,000억 원이 넘는 액수였다고 하는데, 무소유를 설하던 법정이
이렇게 크고 작은 시주를 받은 데 대하여 불교 내부에서도 논란은 있었다.
그러나 법정이 신나서 덥석 받은 것도 아니고, 10년 가까운 실랑이 끝에
김영한의 마지막 원을 이루어준 것이니 이를 비난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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