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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여정(旅情)/▷자연교감(自然)

은성광업소 50년

by 사니조아~ 2024. 7. 27.

일 시: 2016.11.27

츨처 : 가은초35회 김치동선배님 원작


다들 가난했고 생활이 궁핍했던 그 시절
유년의 추억 속에서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가장 재미있었던 기억은
그래도 영화가 우리에게 안겨준 감동이 아닌가 한다.

반경 20리 내외를 세상의 전부로 알고, 맨 날 보는 그 얼굴들이 세상사람
전부인 줄 알았던 그 당시, 이상하게 생긴 가방만한 기계에서 빛이 나와 흰 자막에
비친 또 다른 세상의 신비함은 어느 누구든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활에 별 변화가 없었고 권태롭고 지겹던 시절
조용했던 일상을 흔든 이 영화의 충격은 사람들의 생활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말이 달라지고 옷이 달라지고 유행이 변하면서......
간접적으로 견문을 넓히며... 그렇게 사람사는 모습이 이후 달라져 갔다.

내가 살던 고향은 비록 촌 이라고는 하나
국영기업인 ‘은성 탄좌’가 있었고 그에 따른 시설로 문화회관이 큰 건물로
자리하였으며 당초에는 광산의 각종행사를 위한 회관이었으나
이후 영화가 배급되면서 회관이 아예 극장으로 탈바꿈했다.

언제부터 이곳에서 영화가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영화를 처음 본 기억은 국민학교 1학년 겨울 땐가 ‘칠공주’라는 영화였는데
어머니 손을 잡고 처음 극장을 갔던 기억이 난다.

오래 돼서 내용은 기억이 없고 주인공인 신영균 엄앵란은 처음 알게 되었으며
그 이름은 이후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다.

나는 왕릉 일구 장터에 살았는데 당시 왕릉4구 광산까지 갈려면
( 지금에야 어른이 되서 보니 그리 먼 거리도 아니건만 )
어찌 그리 멀게만 느껴졌던지..........

신작로는 온통 탄 흙 먼지로 뒤 덮혔는데
그 길을 영화포스타를 사방 붙인 찝차가 지나가면서 ..
잘 들리지도 않는 확성기로 영화보러 오라고 요란하게 선전을 해대면
온 동네는 벌집 쑤셔놓은 듯이 시꺼러워 졌다.

손님 많은 가겟집 유리창이나, 혹은 잘 보이는 전봇대에
영화 신 프로 포스트가 나 붙기라도 하면
한참동안 서서 배우이름을 외워보고 대충의 줄거리를 보면서
보지도 못 할 영화를 상상하며 군침을 삼키곤 했다.

“ 어머이! 친구들 하고 영화보로 가구로 극장비 좀 주이소....
 친구들이 밖에서 기다리는데.....“ 라며 눈치를 보면서 아양을 떨고 사정해 보지만

“ 야가 정신이 있나? 없나?   돈이 어데 있단 말이고!
학교에서 단체로 가는 영화만 보먼 됐지!  니   선생님 한테 혼날라꼬 작정을 했구나! ”
택도 없었다.
“ 미성년자 관람불가는 아니고요... 세계 명환데요..... 지금 못 보먼 평생 못 본다 카데요!”
애원해도 어머니는 들은 척 만 척이다.

선기는 밖에서 빨리 오라꼬 연신 불러 쌋는데..... 시간은 자꾸 가는데.....
정말 미칠 지경이다.
할 수 없이 “ 선기야 니 머이 가거라.  내는 좀 이따 따라가께
극장앞 전봇대 밑에서 8시까지 기다리다가 내 안 오면 니 먼저 들어 가거라
미안 하데이! “ 하곤 먼저 보냈다.

아무리 봐도 줄 거 같질 않했다.

괜히 신경질을 부리고 대문을 밧질로 차고........투덜거려도 보지만  ......

이 내 심정을 하늘이 아는지 모르는지.........

아랫방에서  할머니 헛 기침소리가 들렸다.
살며시 가 보니 웃으시며 치마고름 속에 숨겨둔 동전 5원을 엄마 몰래 주신다.
할머니는 맏이인 나를 제일 좋아 하셨다. ( 동생들 하테는  절대 돈을 안 주셨다 )
‘ 우리 할머니 최고! ’ 기분이 날아 갈 것 같았다.
할머니를 안고 얼굴을 부비고서는

갈 길이 바빴다.
검정 고무신 두 짝을 벗어 들고 늦을세라 저녁이라 어두운데도
그 먼 광산 길을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정신없이 뛰어갔다.

전봇대 밑에서 티밥을 한봉지 사 들고는 선기는 눈이 빠져라
여태끗 기다리고 있었다.
반가와서 어쩔줄 몰랐다.

극장 앞은 백 촉 짜리 백열등 두개가 대낯 처럼 환하게 비추고 있었고
런던 미술사 아저씨가 정말 잘 그린 커다란 간판이 멋지게 걸려 있었다
( 이후 도시에서도 극장 간판을 숱하게 봤지만,
지금까지 런던 미술사 아저씨 보다 더 잘 그린 간판은 보질 못했다 )

입장을 하고 있는건지
서로 좋은 자리를  잡을 거라고 밀치며 들어가는데.......
입구에 선,  얼굴과 몸집이 굉장히 큰 무섭게 생긴 거인 아저씨가 떡하니
기도 서 있었는데
“ 자! 자! .......표들 주고     천천이.... 천천이... 아직 시작 할려면 멀었으니께
차례대로 들어 가이소 !“라며  머라 카는데
사람들은 주눅이 들어 조용 조용하게 입장하기 시작했다.



극장 안은 조명이 어둡고 침침했다

높고 커다란 무대 위에는 붉고 검은 융단을 양면으로 한
커튼이 길다랗게 쳐저 있었으며
그 뒤 가 쪽으로는 쪽문이 있어 행사할 때 대기실 같았다.

또 넓은 벽에는 ‘반공 방첩’ ‘금연’ ‘정숙’ 등 붉은 글씨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앉는 좌석은 베니다 판으로 딱딱했으며
옆 사람과는 간격이 좁고, 바닥은 앞뒤 수평이 경사가 없어
앞에 덩치 큰 사람이 앉기라도 하면 뒤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앞사람이 방향을 틀 때마다
고개를 올렸다 내렸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불편했지만 눈은 영화속으로 정신없이 빠져 들어갔다.

혹시 상영도중에 오줌이라도 마려우까봐
옆 사람에게 자리 좀 맡아 달라고 하고는
안나오는 소변을 미리 억지로 보고 나서
맡아달라고는 했지만 자리 뺏끼서까봐 얼른 불이나케 제자리로 돌아왔다.

도시에서 흥행했던 유명한 영화는 진작에 소문이 나서
항상 ‘만원사례’였으며 통로며 벽 쪽이며 뒤 쪽공간에도 사람들이 꽉 차서
숨도 올키 못 쉴 지경이었고
너무 시끄러워 바로 옆에서 얘기 해도 잘 안들리니
다들 흥분해서 목소리를 더 크게 했다.

겨울에는 주로 개탄으로 때는 난로 옆이 명당이고,
더운 여름에는 공중에 달린 헬리꼽터 프로펠라 마냥 생긴
큰 선풍기 밑이 인기가 좋았다.

올 때 티밥이나 옥수꾸, 군고구마, 호떡이라도 가지고 들어오면
극장 안에서 먹는 맛은 진짜 꿀맛이었다.

이윽고 “때르릉”하고 종이 울리면 갑자기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먼저 우리나라 사계절을 찍은 멋진 화면과 함께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한목에 일어서는 바람에 의자소리가 쿠당탕 쿠당탕 요란했는데
모자 쓴 사람은 모자를 벗고, 다들 부동자세를 하고 엄숙하게 애국심을 가슴에 안았다.

시작전에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든 ‘ 대한뉴스’가 방영이 되었는데
주로 정부시책을 홍보 하였으며 박정희 대통령 얼굴이 제일 먼저 나왔다.
라디오 에서나 간간히 듣던 국내외 상황이며 월남소식을
직접 화면으로 보게 되니 감개무량했다.

먼저 예고편을 맛배기로 보여 주었는데
다음에 할 영화가 훨씬 더 재미있을 것 같고 궁금하게 만들었다.

드디어 본 영화가 시작되는데........
숨을 죽이고......

도회지에서 다 돌고, 여기 시골에는 마지막으로 끝물에 온 지라
필림이 얼매나 낡았는지
화면에는 지지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빗줄기 마냥 가는 줄이 몹시 번떡거렸다
주로 흑백 영화가 많았고
몇 년뒤에 총천년색 씨네마스코프 영화가 들어왔는데
흑백 보다가 칼라로 보니 정말 황홀했다

그 당시  영화로는
심청전, 저 하늘에도 슬픔이, 오발탄, 돌아오지 않는 해병,
초우, 맨발의 청춘, 미워도 다시 한번, 빨간 마후라, 남과북, 별아 내 가슴에, 연산군,
내시, 벽속의 여자, 벙어리 삼룡이, 분례기, 마부, 사격장 아이들,
비무장지대, 남자 식모, 카인의 후예,,.......등 등
멜로 드라마나, 소설을 영화 한 것 아니면 주로 전쟁 영화였다.

당시 활약 했던 배우로는
신영균, 박노식, 신성일, 장동휘, 황  해, 허장강, 남궁원, 독고성, 이예춘,
김승호, 최무룡, 김진규, 김희갑, 장민호, 문오장, 이대엽, 윤일봉,
김지미, 최은희, 도금봉, 황정순, 조미령, 문정숙, 문  희, 윤정희, 남정임,
등 이었는데 그때 그 이름이 지금까지 잊혀지질 않했다.

외국 영화로는 하이눈, 황야의 무법자, 셰 인, 백주의 무법자,
닥터지바고, 클레오파트라, 벤 허, 황야의 7인, 등
주로 서부 활극 영화가 많았는데 존 웨인, 클린트이스트우드 등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였다.

간혹 영화 중간 중간에 꼭 극적인 장면에서,
곧잘 필림이 끊기곤 했는데
성질 급한 사람은 여기 저기서 휘바람을 불어대고
혹은 손가락을 입에 넣어 “쐐액! 쐐액! 째지는 소리를 내곤 했는데

가끔 교양 없는 어떤 아저씨는  
“돈 물러 내라”고 큰 소리를 지르곤 했다.
그래도 촬영기사 아저씨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느긋하게
다시 필림을 돌리면 관객들은 다시 조용해졌다.

(1-3 은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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