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19.3.16
대상 : 가은중학교 3-4반 79년도 졸업생
서울에 생선가게를 운영하는 재홍이가 주선을 하여
40년만에 중학교 졸업후 모임을 했던 사진입니다.
한편으로 보면 그렇지만 상당히 애를 쓴 모임입니다.
그속에는 중소기업을 하는 사장 , 고향 문경에서 시민들의 치안을 담당하는
순경, 그리고 직장인, 이미 정년을 맞이하여 퇴직하여 자연인으로 돌아 온 친구
지리산에서 시와 사진을 겸한 지리산이원규시인 오토바이를 타고 지리산에서
가은까지 달려 왔으니 그 속도에 봄 바람이 우정의 바람을 갈라 놓는다 ^^
그리고 사업을 하다가 쫄당 망한 친구 ^^
그져 있는듯 없는듯 세월속에 뭍혀 살아 가는 친구^^
그 안부가 궁금하여 찾아온 친구 ^^
슬하에 조욱현 선생님의 제자이시다.
한결 같이 애정을 가지고 다 휼륭한 사람이 되라고
바르고 올곧게 지도 하신 조욱현 선생님의 근황도 궁금하고
시간되어 주신 선생님과 친구들에게도 반가운 인사를 보냅니다.
난 이미 작년에 조욱현 국어선생님과 만나서 인사를 드린적이
있어서 함께 하고 싶었지만 회사일로 인해 재홍가 주재한 자리에서
응원만 하고 사진 한 두장이 받은 것이 전부입니다.
오고간 대화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사진 보니 낮선 얼굴이 아니기에 반가운 친구들이다.
대보름달과 <분단시대>, 그리고 중3 담임선생님.
정월 대보름날은 돌아가신 어머님 생신이다.
오늘은 월령 15.6일의 슈퍼문이 떠올랐다.
어제보다 더 큰 달, 올해 1년 중 가장 큰 보름달이다.
우리집 토종 매화꽃 청매와 슈퍼문을 다중노출로 담아봤다.
어젯밤엔 문학동인 <분단시대> 선배들-
김종인, 배창환, 김윤현 시인과 더불어
섬진강변 박두규 시인의 집에서 술을 마셨다
성주문학회 회원 두 명과 배창환 부부 등이 모여
행여 눈썹이 하얗게 셀까봐 밤을 지새우며
마당에 나가 정월 대보름달을 보았다.
취했지만 아주 잠깐 어머님의 안부를 물었다.
<분단시대>는 충북과 대구-경북 지역의 시인들인
도종환, 김창규, 배창환, 김용락 시인이 나서고
김종인, 김윤현, 정대호, 김성장, 정원도, 김희식,
김응교 시인이 함께 했다.
1983년에 첫 호를 낸 <분단시대> 동인들은
대구의 문학청년 시절 나의 우상이었다.
그런데, 지곡막걸리와 차를 마시며 얘기하다보니
새삼스레 세상이 참 좁다는 것을 절감했다.
김종인, 배창환, 김윤현 시인 모두가
경북대학교 사범대 출신 선생들인데
나의 중학교 담임인 조욱현 선생의 직속 후배였다.
경북 오지의 가은중학교로 첫 부임한 선생님은
나의 3학년 담임이자 국어선생이었는데
바로 그해 <세계의 문학> 창간 1호 당선자였다.
반가운 나머지 김윤현 형이 곧바로 전화를 걸어
선생님과 한밤중의 반가운 통화를 했다.
조욱현 선생님은 예나 지금이나
워낙 자기 자랑을 하지 못하는 분이었다.
처음에는 시인인 줄도 모른 채 국어를 배웠다.
어느 날 사회담당 예병국 선생이
“아이구 짜슥들아, 너그 담임이 시인인 줄 알기나 하냐?”
타박하는 바람에 겨우 알아챘던 것이다.
그러니까 시골 촌놈이 교과서 밖의 시인을 처음 본 것이다.
지금도 교실 뒷벽 환경미화란에 단아한 글씨로
이백자 원고지에 써놓은 ‘파계사’라는 시가 기억난다.
당시에는 무슨 뜻인지 제대로 몰랐지만
‘과하마 과하마 찰거머리 뒤따르지 않은 마음인 양’
그 구절이 오래 오래 입속을 맴돌았다.
선생님은 당시의 시골학교에서는 보기 드문
그야말로 ‘인간적인 선생’ 이었다.
우리 반의 문제아인 내 친구 하나가 큰 사고를 쳤는데
말하자면 퇴학을 맞을 위기에 처했다.
담임선생님은 곧 바로 교장을 찾아가
“모든 일을 책임지겠으니 내게 맡겨 달라, 퇴학은 절대 안된다”
통 사정을 하고는 교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문제아 친구를 교탁 앞으로 불러내며 말했다.
“엎드려뻗쳐! 친구들에게 실망을 줬으니 너는 좀 맞아야 해!”
단호했다. 화내는 것을 처음 봤다.
다른 반의 밀대를 모두 가져오라고 했다.
1번부터 61번까지 친구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밀대자루로 엉덩이를 때렸다.
한명 이름을 부른 뒤에 한 대를 때리고 또 부르고 때리고
밀대자루 두 개가 다 부러질 때까지 이어졌다.
선생님이 먼저 울면서 때리니 문제아 친구도 울고
결국 우리반 학생들 모두가 울었다.
체벌이 당연시되던 시절이었지만
‘체벌하며 우는 선생님’을 처음 본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내 친구에게
“너는 이제 우리 반의 반장이다, 아침 일찍 나와!”
2주일 근신기간 내내 임시 반장을 시켰다.
내 친구에게는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선생이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문경 봉암사까지 걸어서 소풍을 갔는데
산죽밭에서 선생님이 너무 취해 발목을 삐는 바람에
몇 명이 짐바리 자전거에 태워
하숙집까지 모셔다 드린 적도 있다.
그 하숙집에서 소위 ‘주법’을 배우기도 했다.
그만큼 인간적인 선생님이 우리에겐 자랑스럽기만 했다.
우리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선생님은 문경여고 이창옥 선생님과 결혼했는데
그때부터 첫 부임지인 문경을 한 번도 떠나지 않았다.
당시 시골 촌놈들이 몇 백원씩 돈을 모아
최고급 테니스채를 선물했다.
정구를 좋아하던 선생님의 결혼선물을 사기 위해
친구 몇 명이 기차를 타고 대구에까지 가서
거금 8만원짜리를 사왔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 선생님이 살고 있는 시골집도
동기동창들이 집터를 알아봐주고 건축일까지 도맡아 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기억이 떠오른다.
내가 대학 3학년 때 졸시 ‘유배지의 풀꽃’으로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얼떨결에 시인이 되었는데,
4학년 때 문경의 점촌고등학교에 교생실습을 갔더니
그 학교에 조욱현 선생님이 교무주임을 맡고 있었다.
그날 저녁 선생님이 대뜸 따라오라며 저녁을 사주더니
광산촌 도시 점촌 뒷골목의 ‘방석집’으로 데려갔다.
그 술집에서 밤새 술을 마시다 둘 다 취해 고꾸라졌다.
겨우 술집에서 일어나 세수도 못한 채
앞장선 선생님을 따라 학교에 갔다.
선생과 교생 제자가 술이 덜 깬 채 아침 교문을 들어서다니!
점촌고 정문을 비틀비틀 들어서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니
지금 생각해도 어른을 위한 동화의 한 장면 같다.
그리고 그 해 5.18 봄날에
교생 주제에 철없이 검은 개량한복을 입고 학교에 갔더니
“야, 임마! 교장 보기 전에 빨리 나가. 대구 기념식에 다녀와”
두 말 않고 내쫒듯이 수업을 빼주었다.
나의 술버릇이 비교적 좋은 것도
아마 ‘시인 선생님께’ 술을 배운 탓일 것이다.
내가 시를 쓰게 된 여러 이유 중에
알게 모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인 선생’이다.
올봄 3월16일에 가은중학교 3학년4반 동무들과
조욱현 선생님을 찾아뵙기로 했으니
어언 40년이 넘는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새봄을 맞으며 <분단시대> 선배 시인들과
중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을 생각하니 훈훈해진다.
이제 때는 무르익어 2차 북미회담이 다가오고
‘분단시대’를 넘어 통일시대가 열리고 있다.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어도
원래 한반도가 하나의 말, 하나의 민족이듯이
달 또한 원래 둥글어서 저리 보름달이다.
지구 그림자에 가려져 반달이 되고 그믐달이 되어도
원래 둥근 달이 둥글게 지구를 돌며
한결같이 앞을 보며 지구를 짝사랑해왔다.
별도 오각성이 아니라 달과 지구와 태양처럼 둥글다.
인간이 오랜 세월 동경하다보니 별빛을 보며
인간의 몸인 오체의 모습으로 그려왔을 뿐이다.
보름달이든 초승달이든 달은 원래 둥글고
분단시대의 꿈 또한 원래 통일시대였듯이
세 시간 정도만 참으며 밤하늘을 보면
점점이 별들도 매화꽃 위로 둥글게 원을 그린다.
분단 70년 긴 세월도 그 한반도 유구한 역사에 비춰보면
별들이 궤적을 그리는 그 세 시간도 채 되지 않는다.
추억은 언제나 보름달처럼 둥글고 환한 짝사랑이어도 좋다.
'3.인맥(人脈) > ▶현대차42年(幸)'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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