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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취미활동(挑戰)/▶인문학공부(人文學)

전혜린

by 사니조아~ 2023. 7. 1.

일시 : 2021.10.19(화) 10:00
 전혜린 평전을 읽고

탄생 34년 1월 1일 평남 순천 생~65.1.10 서울 자택 자살 
조선총독부 친일파경찰 아버지 전봉덕(田鳳德) 슬하 1남 7녀 장녀

그의 아버님은 일제 강점기 고등문관시험 사법,행정 양과에 합격한 명석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총독부 경찰관부가 되었고 광복 후에도 법조계에
종사하면서 부유한 집안이 였다. 전봉덕 (1910.12.12~1998.5.18)

 

그의 아버지는 딸 전혜린이 3-4세 때부터  한국과 일본어를 

직접 가르쳤다. 전봉덕은 딸이 판사나 고위간부가 되기를

바랐지만 전혜린의 꿈은 법조인이 아니라 중학교 시절부터 책을

읽고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 었다.

 

그러니 딸의 생각을 전혀 반영하지 않고 그저 판사나 고위 간부가 되길

원했는데 그 의 딸 전혜린은 딱딱한 법조인보다는 문학인이

되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나면서 52년 임시정부가 생기면서 부산에서 이사를 와 아버지의
권유로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법학과는 뒤 전이고
독일문학에 빠져 도강을 하게 되었고 독일 문학에 심취하였다고 합니다.

 

 55년 3학년 재학 중 전공을 독어독문학으로 바꾸었고 그리고 방황하던 중

친구 혜* 따라 비행기 티켓을 구매하여 독일을 갈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독일 뮌헨 루트비하먹사말라안 대학교에 유학하였다.
전봉덕은 전혜린의 유학길을 막지는 않았지만 돈을 여유 있게 보내주지는

않았기 때문에 독일에서 전혜린은 경제적으로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다.

 

독일 유학시절  천주교 영세를 받았다. 56년 독일 유학생이자 법학도였던 

김철수(金哲洙)와 결혼하였고, 59년 딸을 낳았으며,  64년 이혼하였다.

이구한 인생이다.

 

59년 4월에 귀국하자 서울대학교· 성균관대 이화여대에서 강의 의뢰가 왔고

수많은 에세이를 발표했다. 독일에 있을 때부터 사망할 때까지 독일 문학

작품을 여러 편 번역했다.

 

독일에서 받은 학사 학위로 서른한 살이 된 해인 1964년에 성균관대학교

조교수가 되었다

 

당시엔 해외학위는 물론이고 국내 대학에서도 석박사 학위자가 부족했기

때문에 학사 학위자가 교수직을 맡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번역한 책으로는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헤르만해세 《데미안》,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

등 10여 편으로, 이 작품들을 통해 당대 청년들에게 영향을 끼친 바가 크다.

 

65년 1월 10일 서울시 중구 남학동 자택에서 자살을 결단 생을 마감했다. 

 사후(死後) 출간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66년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 가 있다. 1994년에 발간된

《목마른 계절》은 두 수필의 내용을 발췌해서 한 권으로 만든 것이다.

 

이 수필들에서는 치열한 삶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 범상한

일상에 만족하지 말고 이상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야 한다고

시종일관 주장했고, '이상을 향한 동경'을 버릴 때 인간은 현실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족하는 돼지가 되고 만다고 했다

“몇 권의 번역서와 수필 50여 편만을 남긴 채 31세에 요절한 전혜린.

그녀의 짧은 인생이 ‘신화’가 된 까닭은 무엇일까?” 시대를 앞질러

간 천재 여성의 외로웠던 삶’이란 제목이다.

 

기획의도를 ‘전통적 한국의 여성상에서 벗어난 보헤미안적 기질과 광기

그리고 방황 등으로 점철된 전혜린 신화를 살펴보고, 시대를 앞질러간

천재 여성의 외로웠던 생을 더듬어 본다’라고 밝혔다.

 

이 글의 부제로 ‘전혜린은 왜 신화가 되었나’가 붙어있으며, 전혜린의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지인이나 명사들의 짧은 회상의 글들이

아래와 같이 덧붙여져 있다.

친동생인 불문학자 전채린은 당대 여성상과 상반되는 독립적인 사고와

자유분방한 태도에 대해 “언니의 생은 자유로우려는 정신과 현실세계와

대결해 나가는 투쟁과정이었다”고 말했다.

 

서울대 총장이며 법대 재학시절 지도교수였던 신태환은 “한국에서

1세기에 한번쯤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고 술회했으며, 문학평론가

장석주는 “그녀는 특이하게도 자신의 생을 통해 이룬 업적이 아니라,

절대 인식에의 끝없는 갈구와 열띤 방황이라는 삶의 태도만으로

전혜린 신화를 창조했다”고 회고했다.

‘전혜린은 왜 죽음을 선택했을까?’ 라는 의문에서 이 글을 시작해본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재난이나 중병(重病) 같은 위기를 제외하고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다.

 

게다가 다행히도 일상의 분주함과 습관은 언제나 삶의 부정적 사고로부터

우리를 방어해주는 기제가 작용하고 있어 쉽게 생을 포기하지 않는 법이다.

우리를 미망(迷妄)에서 구출해주는 것도 대부분은 이와 같은 일상성의

질서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살자들의 대부분이 정상적인 생활을 박탈당하거나 좌절한 사람들에게

많다는 것이 이를 반증하기도한다. 정상적인 생활리듬은 자살충동을

효율적으로 방어해주는 처방전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독일 바이에른 지방의 주도(主都)인 뮌헨에 있는 님펜부르크 궁전이다.

1662년에 건립되기 시작하여 1675년에 완공되었다. Pixabay
자살이란 자살자 본인이 그 결과를 알고 행하는 죽음이다.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자살은 그것이 생의 거부이건,

포기이건, 어쨌든 사는 것에 실패했음을 고백하는 행위이고, 그것은 또

‘살아가는 쪽’에서 볼 때 배신이요 반역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더욱이 우리가 이런 정상적인 생활패턴을 버리고 늘 깨어있는 의식으로

이 세상의 허무(虛無)와 마주한다면, 자신과 세상의 단절 앞에서 공포에

떨며 전율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게다.

 

이러한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은 발광(發狂)하거나 백치가 되거나 또는

미칠 듯이 사랑에 빠지거나 도박에, 알코올 또는 마약에 취해 있지

않는다면 자살할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하지만 어느 누가 자살로 현실을 도피했다고 해서 우리는 그를

과연 비난할 수 있을까하는 원초적 질문을 던져본다.

인간이 자신의 관념이나 이념 때문에 자살을 결행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관념에 의거해서 자살을

찬미했지만, 장장 72세까지 살다가 결국 폐렴에 걸려 마지막엔

'유언 집행인'을 불러 재산상속까지 처리하는 등 일반적인 모든

절차를 다 밟고 나서 죽었다. 관념과 실행은 다르다는 얘기다.

그러면 전혜린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그는 삶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허무주의자요, 회의론자였다. 그의 내부에는 삶에 대한 집착과 죽음에의

동경이 늘 공존하고 있었으며, 매일매일 그것이 되풀이되었다.

 

그래서 그는 잠시나마 허무의식을 잠재워 주기 위해서나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수면제나 알코올을 손에 붙들고 살았다. 이와 같은

삶과 죽음이라는 의식의 부침(浮沈)은 평생을 통해 되풀이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죽기 전 마지막 순간에도 이 부침이 시험이라도 하듯 나타났는데,

특별히 한 사건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수면제(세코날) 40알을

입으로 털어 넣기 전, 그는 수취인이 '장 아제베도'라는 어떤 남자에게

손편지 글을 남겼다. 궁금증을 자아내는 한 대목이기도하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내가 ‘원소로 환원’하지 않도록 도와줘! 나도 생명 있는 뜨거운

몸이고 싶어. 가능하면 생명을 지속하고 싶어. 그런데 가끔

그 줄이 끊어지려고 하는 때가 있어. 그럴 때면 나는 미치고 말아.

나를 살게 해줘.

내 속에 있는 악마를 쫓아줄 사람은 너야. 나를 살게 해줘”

이 글은 전혜린이 당시 열중하고 있던 대상(對象)에게,

죽기 며칠 전에 쓴 편지글의 일부다. 유품을 정리하던 여동생

채린은 이 편지 수신자의 실명을 발견했으나 누군 인지

밝혀지길 원치 않았다.

 

부치지 못한 편지의 주인공은 죽기 1년 전 이혼한 전

남편 법학자 김철수는 물론 아니었다.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제자이자 연하의 남성인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전혜린은 프랑스의 소설가 ‘모리아크’의 소설 「테레즈 데케이루」

에 나오는 주인공의 남자이름인 ‘장 아제베도’를 원용하여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쓴 이 편지는 일종의 연서(戀書)로써 플라토닉(platonic)한

사랑고백으로 봐야 할 것이다. ‘장 아제베도’는 모리아크의 소설에서는

주인공 여성이 이상형 남성과 로맨틱을 구가하고 있는데 반해,

전혜린이 짝사랑하던 이 남자는 자신에게 손길조차 내밀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이전에도 전혜린은 스무 두 살 때 자살을 결행한 적이

한번 있었다. 뮌헨에서 수학할 당시였는데, 그가 먹은 약은 평범한

것이었으나 그를 죽이기엔 충분한 양이었다.

 

사건 당일 오후 2시에 다량의 약을 먹고, 7시경에 돌아오리라

생각했던, 후에 남편이 된 김철수가 4시경에 조기 귀가하는

바람에 그의 자살은 미수에 그쳐버린 것이다.

 

그는 병원에 실려가 50대의 주사를 맞고 이틀 뒤에 소생했다.

그가 자살을 결행하기 직전의 심경을 동생 채린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나는 흰 새벽 속에 내 마음을 사랑과 고뇌로 부터 순환할,

영원한 기쁜 죽음을 향해 출발했다. 나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보다 나을 것이다. 영원히 나는 모든 정다운 것들과

무거운 짐들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마치 쇠줄을 버리듯 나는

‘지나간 것들’을 내던져야 한다. 그리고 내 앞의 생(生), 죽음

앞에 열려 있는 오른 편 길만을 봐야 한다”

자살을 예고한 글이었다. 아무튼 그땐 자살이 미수에 그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은 언뜻 비슷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그를 마침내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의식의

‘부침’(浮沈)에서 ‘침’(沈)의 순간과 맞닿아 있다. 전혜린에게

‘장 아제베도’는 허무의식을 잠재워줄 유일한 대안으로

간주했음직하다.

 

그러나 그 남자는 전혜린에게 차가웠다. 바로 그 대안이 그 순간

사라졌음을 확신하는 순간, 침대 옆에 놓인 수면제를 대안으로

생각하고 옮아갔으리라. 그는 찰나의 몽롱한 순간에 쉽게 한쪽

대안인 ‘죽음의 매혹’을 선택했고, 다른 한쪽 대안은 포기했을

것이다.

 

너무 빠른 선택을 했는지 모른다. ‘허무(虛無)’들이 너무 가까이

자신 옆에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급박한 찰나의 순간에도

그는 양자택일을 고민했을 것이고, 그 가운데 한쪽을 낚아채듯

선택했을 것이다. 이 선택이 그의 운명을 가르는 회귀할 수없는

분기점이 되었다.

‘살아남는 자’는 양자택일에 대한 강한 압박을 받을지라도, 태연스레

자연의 섭리에 기대어 받아드리는 것에 너무 익숙하다. 윤리나

도덕의 이름으로 말이다.

누구나 한번은 운명적으로 죽어야 한다면 자연의 섭리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전혜린적 실존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죽은 며칠 후 서울 홍제동 화장터에는 혜린의 어머니가 통곡했고,

지인들도 함께 목놓아 울었다. 추워도 지독한 추운 날이었다.

출처 : 시니어매일(http://www.seniormaeil.com)

자살이란 자살자 본인이 그 결과를 알고 행하는 죽음이다.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자살은 그것이 생의

거부이건, 포기이건, 어쨌든 사는 것에 실패했음을 고백하는

행위이고, 그것은 또 ‘살아가는 쪽’에서 볼 때 배신이요

반역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더욱이 우리가 이런 정상적인 생활패턴을 버리고 늘 깨어있는

의식으로 이 세상의 허무(虛無)와 마주한다면, 자신과 세상의

단절 앞에서 공포에 떨며 전율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게다.

 

이러한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은 발광(發狂)하거나 백치가

되거나 또는 미칠 듯이 사랑에 빠지거나 도박에, 알코올 또는

마약에 취해 있지 않는다면 자살할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하지만 어느 누가 자살로 현실을 도피했다고 해서 우리는

그를 과연 비난할 수 있을까하는 원초적 질문을 던져본다.

인간이 자신의 관념이나 이념 때문에 자살을 결행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관념에 의거해서 자살을

찬미했지만, 장장 72세까지 살다가 결국 폐렴에 걸려 마지막엔

'유언 집행인'을 불러 재산상속까지 처리하는 등 일반적인

모든 절차를 다 밟고 나서 죽었다. 관념과 실행은 다르다는 얘기다.

그러면 전혜린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그는 삶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허무주의자요, 회의론자였다. 그의 내부에는 삶에 대한 집착과

죽음에의 동경이 늘 공존하고 있었으며, 매일매일 그것이

되풀이되었다. 그래서 그는 잠시나마 허무의식을 잠재워 주기

위해서나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수면제나 알코올을

손에 붙들고 살았다. 이와 같은 삶과 죽음이라는 의식의

부침(浮沈)은 평생을 통해 되풀이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출처 : 시니어매일(http://www.seniormaeil.com)

전혜린이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한 것은 1952년, 임시 수도 부산에서였다.

전시체제여서 입학이 다소 쉬웠다고 하더라도 최고 학부의 최고 커트라인

학과였다. 입학시험에서 수학이 0점 나왔는데 다른 과목 성적이 워낙 출중해

사정위원회 회의 결과 구제됐다. 민법, 상법, 형사소송법….

 

만 18세의 소녀가 전시연합대학교 임시 가교사에서 받은 수업은 따분했다.

전혜린은 독문과 수업을 도강하면서 독일문학에 심취했다.

일제 고등문관시험 사법·행정 양과에 합격한 아버지는 총독부 관리가 됐다.

광복 이후에도 법조계에 몸담아 우리 사회 최상층부의 삶을 살았다. 딸의

영특함을 일찍 알아보고 서너 살 때부터 한글과 일본어를 손수 가르쳤다.

 

대를 이어 판사나 고위관리가 되기를 바랐지만 딸의 꿈은 법조인이 아니라

문인이 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딸의 유학길을 막지 않았다. 하지만

돈을 여유 있게 보내주지는 않았다.

전혜린은 스물한 살이 된 1955년, 서울법대(지금의 서울대 사범대 부설여중)를

뒤로하고 독일 뮌헨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뮌헨 특유의 우중충한 날씨가

우울증을 가져와 유학 시절 자살 기도를 한 차례 한다.

 

돈이 떨어져 일주일 동안 물만 마시며 버티기도 했다. 지독한 가난과 외로움이

법학도 유학생 김철수와의 결혼을 서두르게 했을 것이다. 독일에서 딸 정화를

낳았고 세 사람은 행복했다. 전혜린은 거기서도 인정받는 수재였다. 학부만

졸업한 한국인 유학생이 학과 조교를 했으니까.

1959년 4월에 귀국하자 서울대·성균관대·이화여대 등에서 강의 의뢰가 왔다.

청탁도 쇄도해 수많은 에세이를 발표했고, 독일에 있을 때부터 작고할 때까지

독일문학 작품을 쉴 새 없이 번역했다. 독일에서 학사를 받고 왔을 뿐인데 갓

서른한 살이 된 해에 성균관대 조교수로 부임했으니 그녀의 세속적인 출세는

순풍에 돛을 단 격이었다.

전혜린의 수필에서 치열한 삶에 대한 열정은 가장 높이 사줄 부분이다. 범상한

일상에 만족하지 말고 이상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야 한다고 그녀는

시종일관 주장했다. ‘이상을 향한 동경’을 버릴 때 우리는 현실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족하는 돼지가 되고 만다고 했다. 뭇 여성에게 인식의

전환을 꾀하자며 이런 식으로 권유하기도 했다.

자기의 삶 전부를 실존을 스스로 순간마다 결단하고 세계를 향해서 투기하는

생활 대신에 한 남성에게 자기를 꽉 맡겨버리고 자기는 더 이상 사고할 필요

없이 사소하고 무상하게 흘러가는 일상성과 사실성의 세계에 파묻히는

것이 얼마나 편하고 또 사회에서 잘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의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여자도 그것에 완전히 만족하거나 행복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런 생활에는 일순 일순의 팽팽한 충일감과 초월의 느낌이 없을 것이다.

어느 주부든지 어떤 순간에는 반드시 자기를 부조리하게 느낄 것이다. 쌀 씻고

빨래하고 옷 꿰매고 나날의 무서울 만큼 단조한 반복 속에서 그 여자의 의식은

엷게나마 눈을 뜰 것이다.

예전에는 여성이 가사노동, 자녀 양육, 남편 봉양을 하면서 행복을 느껴왔지만

이제는 어느 여자도 그것에 완전히 만족하거나 행복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녀는 ‘여성 의식의 눈뜸’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제 여성은 주부로서의

역할 수행에 행복을 느끼지 말고 자신의 실존을 의식하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성의 사회진출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쓰기도 했다.

세상은 달라졌고 사회는 발전했고 문명은 기술화되었고 여성은 사회에 점점

더 진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블루 스타킹(blue stocking) 같은 이름으로 가볍게

넘겨버리기에는 그 수가 너무 대량으로 되었고 그들의 활동 분야는 핵실험에서

트랙터 운전에 이르기까지 손 안 가는 데가 없어져 버렸다. 남성의 꿈을 산산이

부숴버릴 만큼 그만큼 여성의 모습은 변모를 거듭하여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전혜린은 1955년 10월부터 1959년 4월까지 유학 가 있는 동안 독일 여성의

사회진출 모습을 많이 보았다. 여성은 부엌에서만 일하는 것이 아니었다.

“핵실험에서 트랙터 운전에 이르기까지 손 안 가는 데가 없어져버린”

여성과 “일개 연대를 호령하는 여인, 우주비행선에 서슴없이 타보는 여인”들의

사회진출 현상을 보고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여성은 이제 ‘자기 앞의 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남존여비나

여필종부는 구시대의 낡은 개념이 된다. 남녀 간 감정은 “양성이 너무나 같은

일을(인류에의 봉사 같은 숭고한 일을) 함으로써 양성 간의 호기심이나 정열을

낳을 만한 신비나 거리감이 없어져버리고, 남아 있다면 동료애라고나 불릴

우애 감정뿐”이라고 전해준다. 여성성이 모성에 있다고 본 과거의 의식에서

벗어나 전혜린은 양성평등을 주장했다.

 
두 가지 불행이 엄습했다. 이혼과 연애 실패. 그녀는 가정주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서울문리대 근처 학림다방에서는 줄담배를 피웠고

명동의 술집 은성에서 통금시간이 될 때까지 술을 마셨다. 4·19 혁명과

5·16 쿠데타, 6·3 사태 등을 보며 이념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할 때 학림다방과

술집 은성은 탈출구였다. 유학시절 자유를 마음껏 누린 그녀는 한국의 정치

상황이 절망스러웠다. 유교적 전통과 가부장제가 너무 싫었다. 때마침 젊은

제자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의 어머니가 와서 무릎을 꿇고 호소했다.

아들을 포기해달라고.

1965년 1월 11일 일요일, 서른두 살 나이에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죽은

전혜린은 죽은 지 50년이 다 되어 가고 있음에도 여전히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문제적 인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천주교 서울대교구 용인공원묘원에 있

그녀의 무덤은 쓸쓸하기만 하다. 김남조 시인이 쓴 묘비명이 방문객들의

말문을 닫게 한다.

하늘이 주신 시간에 시간을 보태고/ 사랑에 사랑을 보탠 다음/ 눈감아 여기 잠든 이/ 전혜린 여사여

 


33년 대구에서 출생 6남 1녀 중 장남

56년 서울대 법대 졸업

57년 독일 뮌헨에서 전혜린과 결혼
61년 서독 뮌헨대 졸업

62년 서울대 법대 조교수

67년 미국 하바드 법과대학원 수료

71년 서울대 법학과 박수

72년 서울대 법과대 교수

90년 한국 헌법 연구소장

98년 제주 탐라대 총장 

98~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

 

왼 쪽 위 안경 껴신분

전혜린(1933-1965)은 수필가, 번역가로 활동했는데, 서울대 총장이며 법대 재학 시절

지도교수였던 신태환은 전혜린을 “한국에서 1세기에 한 번쯤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고

불렸다. 전혜린은 일제강점기에 평안남도에서 8남매 가운데 장녀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때는 서울과 신의주에서, 경기 여중・고 시절에는 서울과 부산에서 보냈다.

궁핍했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고급 관리 아버지를 둔 덕에 그는 서너 살 때부터

한글책과 일어책을 두루 읽었고 소공녀가 입었을만한 흰 원피스를 입고 다녔다.

아버지 전봉덕은 29세에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행정에 모두 합격해 천재

소리를 듣던 사람이다. 전혜린은 그런 아버지의 편애를 받으며 지식욕을 키워나갔다.

1952년 열여덟 살에 서울대 법대에 응시했는데, 입학시험에서 전혜린은 수학 성적은

0점이었으나 다른 과목 성적이 출중하여 합격했는데 입학 석차도 법대에서 2등을

차지할 정도로 재원이었다. 당시엔 과락(科落) 제도가 있어 한 과목이라도 0점을

받으면 입학이 불가능하던 시절인데 천운이 따른 셈이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대에 입학은 하였으나, 법학은 그의 본질적 성격과 맞지 않았다. 매사의 모든

것에 일일이 울타리를 쳐서 금지하고 규정하는 냉정하고도 딱딱한 학문이

의 뜨거운 감성에는 맞지 않았다.

스무한 살이던 55년 가을, 법과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홀연히 독일

뮌헨으로 떠난다. 그것도 국비유학이 아닌 자비유학이었는데, 당시에는 매우

의례적 일이었다. 그의 생에 커다란 분기점을 이루는 결심이었다.

 

뮌헨대학에서는 대학시절 전공했던 법철학에서 독일문학으로 옮겨 오직

문학과 철학에 몰두했다. 그 해 가톨릭에 입교하여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세례명을 받는다.

 

이듬해에는 아버지의 소개로 대구 출신 남성(23)과 결혼하였다. 전혜린(24)은

사실 이 남성이 독일에 올 것으로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두 집안 간에는 결혼

밀약이 있었기 때문에, 뒷날 그녀의 남편이 된 이 남자가 독일로 왔을 때

약혼자라는 생각보다는 남편이 와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의 짧은 생애에서 찬란한, 그러나 슬픈 제3기는 스무다섯 살 되던 59년,

뮌헨대학에서 4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부터 시작된다.

 

귀국 후 서울대 법대와 이화여대 강사로 있던 중, 서른 살 때에 그가

그토록 꿈꿔왔던 대학 교수(성균관대 독문학과 조교수)가 된다.

드디어 제도권의 틀 속에 진입한 것이다. 1년간의 짧은 교수생활은

그에게 자유로움보다는 틀에 박힌 속박에 불과했다. 그해 전혜린은

남편과 결혼생활 7년 만에 합의이혼을 하게 된다.

서른한 살이 되던 이듬해 1월 10일 일요일 아침에 그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것이 전혜린 삶의 개략적 이력이다.

당시 언론이 전혜린에 주목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사망한 이후부터다.

그것도 사망한 직후에는 갑작스러운 죽음 자체만을 비중 있게 속보로

전하다가, 한해 뒤인 66년 「동아 PR문제연구소」에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수필집이 출간되어 16주간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자마자 전혜린의 존재에 본격적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가 번역한 작품들, ‘데미안’, ‘생의 한가운데’도 덩달아 60년대를

거쳐 80년대까지 한국 독자들을 사로잡는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주로 여학생, 특히 이화여대생을 중심으로 읽히던 이 책은 전국적 단위의

독서 열풍으로 확산되었다. 일종의 ‘신드롬’이라 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전혜린 열풍은 대중문화와 독서계를 휩쓸었다.

 

이런 와중에 뜻밖의 일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그해 8월에는 두 명의

여고생 문학소녀가 “나는 전혜린과 똑같이 고독하다. 어디론가 가고

싶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동반 자살하는 일을 낳기도 했다.

‘신드롬’이 신드롬에 그치지 않고 전혜린 따라 하기로 옮겨 붙었다.

다시 전혜린이 사망한 65년 1월로 돌아가 보자. 당시 신문기사의 경우,

한 개인의 업적을 기리고 추모하기보다 ‘전혜린의 죽음’이 불러일으킨

반향에 초점을 맞추어 기사화하려는 경향이 적잖았다.

 

‘한국일보’는 사망한 1주일 뒤인 1월 17일 기사에서 전혜린의 장례식

소식과 그가 죽기 전 상황, 사망 원인과 관련된 의문, 지인의 말,

유족의 모습 등을 소상하게 전하고 있다. 그 기사는 다음과 같다.

“신춘(新春)의 여성계에 적지 않은 화제와 파문을 일게 한 소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희귀한 여류 법철학자요, 독일 문학가인 전혜린(31) 씨의

죽음이다.

 

지난 12일 간소하나마 장중한 장례식이 시내 남학동 25번지 전혜린 씨

친정집에서 치러졌다. 얼마 전부터 부군 김철수(30) 씨와의 불화설이

떠돌던 이 여류는 외딸 정화(7) 양을 데리고 친정집에 와 있었다.

 

부음이 전해지자 항간에 구구한 억측이 나돌았다. 수면제(세코 날)

과용으로 인한 사고다. 과도한 저혈압으로 인한 자연사다.

자살일지도 모른다.. 등등. 커피 15잔을 마셔야 비로소 평상인과

같아질 만큼 심장이 약화되어 있던 것은 사실이다.

 

“사망 전날 폭음했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가정생활뿐 아니라, 모든

일상을 현실에 적응시킬 수 없었던 그는,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해

늘 비관하고 있었거든요” 친구 중 한 사람이 이렇게 술회하며 고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서독 뮌헨대학 출신으로 ‘안네 프랑크의 일기’, ‘어떤 미소’,

‘압록강은 흐른다’ 등의 역서를 낸 전혜린 씨는 점성술, 운명학에

기대어 곧잘 점을 치던 이색적인 여성이었으며, 더욱이 딸 정화

양의 장래(將來)를 기록한 쪽지가 그의 유품에서 나와 유족을

눈물겹게 하고 있다”

전혜린에게 딸 정화는 태양 같은 존재였다. “정화같이 끝없이

사랑스러운 아이가 나에게 주어져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데

주어진 것은 인생의 덤이며, 우연이거나 우주의 질서”라고

일기에 썼다.

 

이처럼 한국일보 기사는 사망 직후 전혜린의 죽음을, 억측과

소문을 근거로 가정 불화설, 자살설 등의 스캔들로 만들었으며,

그를 희귀하고 이색적인 여성으로 희화시켜가고 있었다.

죽음 직후에는 이런 언론의 논조가 대세이기도 하였다.

https://youtu.be/3 cw9 HsTwxHI

 

 

전봉덕(田鳳德, 창씨명 田中鳳德, 1910~) /화려한 경력으로 위장한 친일경찰의 본색

·1941년 평안북도 경찰부 보안과장.
·1943년 경기도 경찰부 수송보안과장
·1949년 헌병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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