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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맥(人脈)/▶현대차42年(幸)

현대차 신문게재

by 사니조아~ 2023. 6. 24.

◆ 04년도 3월 현대차 신문에 게재된 내용 임.

이정탁기자의 권유에 의거 내 어릴적시절 추억의 타임머신을
타고 자신이 없는 내 글이 신문에 게재되었던 글 임.

푸지기도 어려운 시절 과연 가난이 죄는 아니였다.

간단히 나의 얼굴이울산권역(매일신문 경상일보 울산신문등) 게재된바 있지만

어디선가 아라 보는손님이 있어 무안 할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 깊어가는 가을 김용미씨가 퍼온글 (가은인의방)

이창녕 선생님 글과 동일 해 보인다.

이글은 주간문경에 게재된 허운 이창녕(전 점촌초등 교장)선생님의 글입니다.
고향이 가은 작천 도장골이신지라 남부쪽에 사시는 분들께는
옛 향수에 젖은 소박하고 아름다운 글이라 생각하여
오늘 신문을 보다가 혼자 읽기 아까워 실어봅니다.(선생님! 괜찮으시죠?)
...........................................

"멍석이야기"

왕릉장터에서 덤소모리를 돌아 송아지 굴을 지나면 작천 앞 관산들이 환하게 펼쳐집니다.
가은의 먹거리 60% 정도는 이 들녘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아차 동네 앞 소께들과 관산들의 젖줄 역할을 하는 영강은 명경지수(明鏡止水)였지요.
그 냇가 옆에는 밤나무가 많이 있어서 가을이면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갈 때면 한 번은

꼭 들렸다가 가는 곳이지요.

작천, 성저, 성유, 아채 등 농사를 주로 하던 동네의 유일한 냇가가 영강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밀농사도 참 많이 하였는데 타작을 마친 밀을 씻기 위하여 모두가 영강으로 밀을

가져와서 씻고 멍석을 강변에 펴놓고 거기서 밀을 말렸지요.
덜 말린 밀을 가져올 수가 없어서 밀을 지키느라 강변에다 모깃불을 피워놓고 밤을 새운 적도

있었습니다.

한 번은 모닥불을 해 놓고 깜빡 잠이 드는 바람에 불이 멍석에 옮겨 붙어, 멍석을 태워서 아버님께

혼이 난 기억이 아직도 새롭습니다.

작천으로 접어드는 길목에는 팽나무가 두어 그루 있는데, 그늘도 좋고 팽나무 가지가 사람들이

올라앉아서 놀기에 좋도록 되어 있어서, 아이들이 많이 올라가 놀았습니다.
그런데 그 놀이터가 초등학교 시절에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힘세고 행실이 좋지 않은 몇몇의 부랑아들이 나무를 점거하고 오가는 학생들을

많이도 괴롭혔지요!
저도 그 곳에서 코피가 수차례 터지고 가지고 있던 물건도 빼앗겼습니다.
그러니 학생 폭력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그 뿌리의 역사(?)가 상당히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는 그 길로 다니는 것이 두려워서 학교를 나서면 가절 동네 앞에서 산으로 올라

(지금의 상수도 시설이 있는 곳)

공동묘지를 지나 옥봉서당 앞으로 해서 작천 뒷재를 넘어 무내 앞으로 난 소로 길을 따라

도장골로 갔습니다.
산길을 다니다 보니 자연히 풀쐐기, 벌 등의 독충에 많이도 쏘였지요.
다리나 팔뚝에 상처가 나서 아물날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요새 같으면 좋은 약이 있어서 금방 나을 상처도 그 시절에는 자연적으로 치료되는

길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니 가정의 위생상태는 엉망이고 몸이 아파도 겨우 민간요법으로 치료하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명이 질긴 놈은 살았고 그렇지 못한 놈은 죽을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공포의 장소였던 팽나무 밑을 가끔 고향에 들릴 때면 일부러 시간을 내어

한참씩 앉아서 놀다가 옵니다.


비 오는 날은 나무에 아이들이 없어서 마음 놓고 큰길로 다녔던 기억을 하면서 나 혼자 피식

웃곤 하면 영문을 모르는 집사람은 괜한 의심을 하기도 하지요.


“당신은 고향에 올 때면 팽나무 그늘을 찾는데 사연이 있는 곳 아니요?” 집사람은 팽나무

아래를 총각 시절 처녀와 만나던 장소로 생각하는지 야시끼리한 눈빛을 보내기도 합니다.

작천 동네를 들어가는 길이 옛날에는 팽나무 아래로 나 있었는데 경지정리를 하면서,
지금의 길이 다시 났고 그 시절 길은 없어지고 팽나무는 아스팔트 길옆으로 비껴 앉아서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쓸쓸함만 지키고 서있습니다.
작천에서 아채까지 영강을 가로지르는 2차선 다리가 새롭게 놓여서 옛 정취는 많이 훼손

되었으나, 나날이 발전하는 고향의 상징물 같아서 구경삼아 잠시 다리 그늘에서 쉬었다 옵니다.

변한 것이 없다면 영강에 지천으로 나는 골뱅이와 민물고기의 담백한 맛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입니다.
낮에 잡는 골뱅이 보다는 밤에 잡는 골뱅이의 크기가 훨씬 더 큽니다.
그래서 밤이면 횃불을 들고 골뱅이와 물고기를 밤늦도록 불치기를 하였습니다.


물고기는 배를 따서 걸배이탕을 끓여 멍석위에 빙 둘러 앉아서 밤참으로 나눠 먹었던

그 시절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잡은 골뱅이를 버지기에 쏟아 붓고 약간의 소금을 뿌려서 밤새 해곰을 토하게 한 뒤에

다시 벅벅문때 씻어서 삶아내면, 온 식솔이(특히 아이들) 신문잎나무 까시를(바늘 대용품)

하나씩 들고 빙 둘러 앉아서 골뱅이를 까기 시작하면, 골뱅이 알이 그릇에 모이는

것보다 입으로 직행하는 것이 더 많았습니다.그러다 보니 어머니께 야단도 많이 맞았습니다.

어머니의 골뱅이 국 맛은 정말로 독보적이어서 골뱅이 국 전문 식당을 해 보라는

제의까지 받았을 정도로 알려졌습니다.
지금은 집사람이 전수를 받았는지 제법 국 맛이 괜찮아서 자주 끓여 먹는 편입니다.
한 양제기 하실라우? 하하하 고맙습니다.
(의도적으로 사투리를 많이 쓰고 있음을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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