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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취미활동(挑戰)/▶인문학공부(人文學)

줬으면 그만이지

by 사니조아~ 2023. 2. 9.

23.02.09(목) 17:00
도서출판 피플파워 
책 가격 : 2만원 
지은이 : 김주완 기자
(64년생  前 경남일보  편집국장 근무)
1987년 6월 전역과 함께 예비군복을 입은 채 6월항쟁에 참여했다.

문학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1990년 우연히 지역주간지 《남강신문》
(현 진주신문)에서 기자로 일하게 됐다.

그러다 1991년 진주에서 일어난 한 시국사건이 전국 언론에
의해 완벽하게 왜곡되는 과정을 우연히 목격한다.
이를 계기로 평생 지역신문 기자로 살기로 마음먹는다.

1992년 《경남매일》에 입사, 1993년 노동조합 사무국장을
맡아 한 달 간의 전면파업을 주도했다. 1998년부터 1999년까지
《경남도민일보》 창간 작업에 참여했다. 2003년부터 2004년까지
언론노조 경남도민일보 지부장과 부산·울산·경남언론노조협의회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시민사회부와 자치행정부 기자로 살았다.

2005년 시민사회부장을 거쳐 현재 자치행정부장을 맡고 있다.
지금이라도 당장 부장직을 벗고 다시 취재일선에 나가고 싶다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현장기자’이자 ‘지역신문기자'이다.

풍운아 채현국 
펼난사람  , 별난인생 등  

이만큼 베푼 사람은 많지만
이만큼 드러내지 않은 이는 없다”

20대 중반부터 50년 넘게 이어온
기대 없이 베풀고 대가 바라지 않는 삶
선한 영향력 절로 넓혀가는 김장하 바이러스
도대체 무엇이 이런 삶을 가능하게 했을까.

난 그분의 할아버지의 정신적 가치가 있었고
가난하여 중학교 졸업후 한약방에 취직을 하면서 배움에 대한 한을 벗고자 하는
욕망다하여 한이 맺힌 것이 아닌가 싶다. 

그 가난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중학교 졸업후 한약방에서
한약방에서 한약재료와 공부를 다시하면서 허드랜일을 하면서 18세 나이에 
한약종사업 국가시험에 합격 그 이듬해 19세에  한약방면허를 취득하여 
경남사천에서 한약업을 시작하면서 수익을 내면 어려운 환경에 처한 이웃을
돕고 특히 환경이 어려운 사람에 배우지 못한 젊은 청년들을 도운것이 습관이
된것이 평생을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정치인과는 절대 상대를 하지 않았고 놀려간다는 사람 절대 돕지 
않았다. 

인물지이불온(不知而不慍) 이면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라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다면 그는 군자가 아니겠는가?

공자의 『논어』에는 ‘인생의 지침’이 되는 좋은 명언이 매우 많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이 구절은 백미에 속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인정받길 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타인을
원망하거나 노여워하곤 합니다. 그러나 타인 혹은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탓하기 전, 먼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하지 않을까요?
자신에게서 부족함을 찾기보다 타인의 안목을 탓하며 문제를 외부로
돌리다보면 자신의 인격을 갖추고 발전하기란 어렵습니다.
 
과연 우리 자신이 갖추고 있는 인격과 사유세계, 지식, 덕망 등이
타인에게 인정받을 만한 것인지부터 성찰해봐야 합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고, 자기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 이러한 사람을
군자라 하지요  이 말씀을 평생 잊지 않고 노력하신 분이고 몸소 실천하신
김장하 선생님 ^^

저도 존경합니다.

이래글은 기자 김주완님께서 취재하는 과정을 격은 일들을 쓰 내려온 글입니다.
 

취재 과정에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어떻게 김장하 선생의 허락을 받았느냐”는 말이었다. 하지만 선생은 허락한 적이 없다. 선생은 그동안 형평운동기념사업회를 비롯한 여러 공적인 단체에 몸을 담고 공적인 활동을 해왔다. 따라서 선생은 공인(公人)에 준(準)하는 인물을 취재하겠다는데, 그것까지 못하게 막을 권리는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김주완기자 김현지 pd


인터뷰도 한 적이 없다. 찾아오는 사람을 냉정하게 내치지 못하는 선생의 약점(?)을 공략했을 뿐이다. 그리고 많은 분이 자연스럽게 선생과 함께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셨다. 그분들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2021년 11월 엠비씨경남 김현지 피디로부터 함께 취재하자는 제안을 받았고, 덕분에 내가 아예 접근하지 못했거나 놓쳤을 것들을 얻어 건진 것도 많았다. 특히 김현지 피디와 강호진 촬영감독, 차선영 작가의 기획력과 섭외력, 취재현장의 순발력에 덕본 게 많다.
‘100명의 김장하, 1000명의 김장하’를 취재 과정에서 많이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기쁨이었다. 하남칠 교장은 ‘장학금 돌려주기’ 차원에서 모교 학생들에게 오랜 세월 매년 장학금을 주고 있었고, 본문에 등장하진 않지만 명신고 출신 건축가 박범주(1970~) 씨도 문화예술계에 든든한 후원자로 김장하를 닮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책에 등장한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등장하지 않은 사람들 중에도 이미 ‘김장하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이 많았다. 이런 선순환이 돌고 돌아 김장하 선생이 꿈꾸는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이 반드시 오리라 믿는다.

취재 과정에서 김현지 피디는 만나는 사람마다 “김장하 선생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이라는 질문을 던졌다. ‘생불’ ‘보살’ ‘의인’ ‘진정한 어른’ ‘이 시대의 예수’ ‘든든한 뒷배’ ‘시민운동의 비빌 언덕’ ‘호의(好義)와 경의(敬義)의 표본’ ‘남명 조식 선생 같은 분’ ‘모든 것을 품어주는 호수’ 등 다양한 표현이 나왔다.
그런데 내가 가장 공감했던 표현은 ‘이 시대의 강상호 선생’이었다. 극단현장 고능석 대표가 한 말이었다. 대중적으로 강상호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방송용으로는 별로였겠지만, 호의호식할 수 있는 부자임에도 자신의 재산을 털어 세상의 가장 천대받는 사람들 편에서 평등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앞장섰다는 점에서 가장 닮은 두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