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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취미활동(挑戰)/▶인문학공부(人文學)

토지 박경리

by 사니조아~ 2024. 5. 15.

 

박경리 선생님 연혁

1926년 10월 28일 경남 충무시 명정리에서 박수영(朴壽永)씨의 장녀로 출생
1945년 진주고등여학교 졸업
1946년 1월 30일 김행도(金幸道)와 결혼
1950년 12월 25일 남편과 사별
1955년 8월《현대문학》에 김동리에 의해 단편〈계산〉이 추천
1956년 8월《현대문학》에 단편〈흑흑백백〉이 추천 완료되어 본격적인 문단활동 시작
1957년 단편〈불신시대〉로 제3회《현대문학》신인문학상 수상
1958년 첫 장편〈연가〉를《민주신보》에 연재, 단편〈벽지〉,〈암흑시대〉등 발표
1959년 장편〈표류도〉발표, 이 작품으로 제3회 내성문학상 수상
1962년 전작 장편소설〈김약국의 딸들〉발표
1963년 장편〈파시〉연재
1965년 장편〈시장과 전장〉으로 제2회 한국여류문학상 수상. 장편〈녹지대〉연재
1966년 단편〈집〉,〈인간〉,〈평면도〉, 연작〈환상의 시기〉발표, 수필집《Q씨에게》간행
1968년 단편〈우화〉,〈약으로도 못 고치는 병〉발표
1969년 〈토지〉1부를《현대문학》에 연재(1969. 9∼1972. 9)
1970년 단편〈밀고자〉발표, 장편〈창〉연재
1972년 〈토지〉1부로 제7회 월탄문학상 수상
〈토지〉2부를《문학사상》에 연재(1972. 10∼1975. 10)
1974년 장편〈단층〉발표
1977년 〈토지〉3부를《독서생활》(1977. 1∼1977. 5),《한국문학》에 연재(1977. 6∼1978. 1)
수필집《호수》,《거리의 악사》(민음사) 간행
1979년 박경리 문학전집 전16권(지식산업사) 간행
1980년 원주시 단구동 742번지(지금의 토지문학공원)에 정착
1983년 〈토지〉4부를《정경문화》에 연재(1983. 7∼1983. 12)
1985년 수필집《원주통신》(지식산업사) 간행
1987년 〈토지〉4부를《월간경향》에 연재(1987.8∼1988.5)
1988년 시집《못 떠나는 배》(지식산업사) 간행
1990년 제4회 인촌상 수상
중국기행문《만리장성의 나라》, 시집《도시의 고양이들》(동광출판사) 간행
1991년 8월 연세대학교 원주 캠퍼스에서 강의 시작
1992년 9월 1일부터〈토지〉5부를《문화일보》에 연재 시작
1993년 장편《김약국의 딸들》,《파시》,《시장과 전장》(나남출판) 간행
1994년 <박경리의 원주통신 -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문학선<환상의 시기>,
《가을에 온 여인》(나남출판) 간행. 8월 15일 집필 26년 만에《토지》탈고.
이화여대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 수여
10월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서 '올해의 여성상' 수상
12월 유네스코 서울위원회 '올해의 인물'로 선정
1995년 3월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 객원 교수로 임용
《문학을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현대문학사) 간행
1996년 3월 제6회 '호암상예술상' 수상
4월 칠레정부로부터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문학기념메달' 수여 받음
5월 토지문화재단 창립 발기인 대회
1997년 연세대학교 용재 석좌교수로 임용. 사단법인 토지문화관 이사장
1998년 토지문화관 착공, 건립, 1999년 6월 9일 개관
1999년 장편《표류도》(나남출판) 간행
2000년 시집《우리들의 시간》(나남출판) 간행
2007년 《가설을 위한 망상》(나남출판) 간행

1)토지의 서문

할 말을 줄이고 또 줄여야 하는 인내심에는 억압적 속성이 있으며, 부정적 성향에다 모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늘 현실도피를 꿈꾸고 있기 때문인데 내게는 어떤 것도 합리화할 용기가 없다.
솔직히 말해서 그동안 나는《토지》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지겨웠고 부담스런 짐을 부리고 싶었다.
심지어 <토지문화관>에 관해서도 소설과는 무관하며 '토지공사'에서 지었으니 토지라, 신경질적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또 그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어느 특정한 작가의 몫이 전혀 아니며 예술가, 학문하는 분들이 활용하는, 다만 그런 곳이기 때문이다.

그해, 그러니까 토지를 끝낸 1994년 8월 15일, 그때도 나는 해방감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멍청히 앉아있었다. 방향조차 잡을 수 없었고 막막했던 길 위에서, 폭풍이 몰고 간 세월이 끔찍하여 그랬을까.

생각해보면《토지》의 운명도 기구했다. 25년 동안 여러 지면(紙面)을 전전했고 4부까지 출간되었으나 3년 동안 출판정지, 절필한 일이 있었다. 완간이 된 뒤에도 출판계약이 끝나면서 3년간 책을 내지 않고 절판상태를 애써 외면했다. 작품이 나간 이상 독자에게는 읽을 권리가 있고 이미 작가 손에서 떠난 거라며, 꾸지람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구세대에 속하고 편협한 나로서는 문학작품이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생산되고 소비되는 오늘의 후세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상인(商人)과 작가의 차이는 무엇이며 기술자와 작가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차이가 없다면 결국 문학은 죽어갈 수밖에 없다. 의미를 상실한 문학, 맹목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삶,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 책이 다시 나가게 되니 마음이 석연찮다. 자기연민이랄까, 자조적(自嘲的)이며 투항한 패잔병 같은 비애를 느낀다.

나는 왜 작가가 되었을까. 얼마 전에 하동 평사리에 최 참판댁을 복원해놓고 <토지문학제>라는 행사가 있었다. 허리를 다쳐 운신이 불편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뒷전이 내 편안한 자리로 늘 치부했던 숫기 없는 기질 탓도 있어 잔치에 참가하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딸아이의 부축을 받으며 하동으로 내려갔다. 섬진강 강변 길을 따라가는데 지천으로 쌓아놓은 붉은 감이 오후 햇빛을 받고 있었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그때도 왜 나는 작가가 되었을까, 마음속으로 뇌었다.

해거름의 행사장에서 몸과 마음이 얼어버린 나는 자동인형처럼 연단으로 올라갔다. 지리산의 한(恨)에 대하여 겨우 입을 열었다. 오랜 옛적부터 지리산은 사람들의 한과 슬픔을 함께 해왔으며, 핍박받고 가난하고 쫓기는 사람, 각기 사연을 안고 숨어드는 생명들을 산은 넓은 품으로 싸안았고 동족상쟁으로 피 흐르던 곳, 하며 횡설수설하는데 별안간 목이 메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예상치 못한 일이 내 안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세월이 아우성치며 달겨드는 것 같았다. 둑이 터져서 온갖 일들이 쏟아져내리는 것 같았다. 아아 이제야 알겠구나, 《토지》를 쓴 연유를 알겠구나 마음속으로 울부짖으며 나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지도 한장 들고 한번 찾아와 본 적이 없는 악양면 평사리, 이곳에 <토지>의 기둥을 세운 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연치고는 너무 신기하여 과연 박 아무개의 의도라 할 수 있겠는지, 아마도 그는 누군가의 도구가 아니었을까, 전신이 떨렸다.

30여 년이 지난 뒤에 작품의 현장에서 나는 비로소 《토지》를 실감했다. 서러움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삶을 잇는 서러움이었다. 악양평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외부에서는 넘볼 수 없는 호수의 수면같이 아름답고 광활하며 비옥한 땅이다. 그땅 서편인가? 골격이 굵은 지리산 한자락이 들어와 있었다. 지리산이 한과 눈물과 핏빛 수난의 역사적 현장이라면 악양은 풍요를 약속한 이상향(理想鄕)이다. 두 곳이 맞물린 형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가. 고난의 역정을 밟고 가는 수없는 무리. 이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라면 이상향을 꿈꾸고 지향하며 가는 것 또한 우리네 삶의 갈망이다. 그리고 진실이다.

집으로 돌아와서, 지금 나에게 남아있는 것은 《토지》에 나오는 인물같은 평사리마을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주머니, 그리고 아저씨들의 소박하고 따뜻한 인간의 향기뿐 아무것도 없다. 충격과 감동, 서러움은 뜬구름 같이,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같이 사라져버렸다. 다만 죄스러움이 가끔 마른 침 삼키듯 마음 바닥에 떨어지곤 한다. 필시 관광용이 될 최 참판댁 때문인데 또 하나, 지리산에 누를 끼친 것이나 아닐까.

지리산의 수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먹고 살만한 사람들에 의해 산은 신음하고 상처투성이다. 어디 지리산뿐일까마는 산짐승들이 숨어서 쉬어볼 만한 곳도 마땅치 않고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식물, 떠나버린 생명들, 바위를 타고 흐르던 생명수는 썩어가고 있다 한다.

도시 인간들이 이룩한 것이 무엇일까? 백팔번뇌, 끝이 없구나. 세사(世事) 한귀퉁이에 비루한 마음 걸어놓고 훨훨 껍데기 벗어던지며 떠나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럽다. 소멸의 시기는 눈앞으로 다가오는데 삶의 의미는 멀고도 멀어 너무나 아득하다.

2) 토지의 연혁

박경리의《토지》는 우리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우리 민족의 삶을 총체적으로 그려내는 가운데 진정한 삶에 대한 탐색을 탁월하게 보여준 역작이다. 1969년부터 1994년까지 26년간의 창작기간을 걸쳐 완성된《토지》는 그 길이만도 원고지로 대략 31,200장의 분량이며, 전체 5부 25편 362장(序 포함)으로 각 편과 장에는 제목이 붙어 있다.

《토지》가 연재되기 1년쯤 전에 발표된 단편 [약으로도 못 고치는 병](1968.11)에는《토지》의 1부 1권의 내용이 응축되어 있어, 작가가 이미 훨씬 전부터 이 작품의 구체적인 내용을 구상하고 집필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 창작, 연재된 만큼《토지》는 문학지와 일반 잡지, 신문 등 다양한 매체를 두루 섭렵했다. 제1부는 1969년 9월부터 1972년 9월까지 만 3년 동안 <현대문학>에, 이어 제2부는 <문학사상>으로 옮겨 1972년 10월부터 1975년 10월까지 역시 만 3년 동안 연재되었다.

제3부는 1977년 1월부터 5월까지는 <독서생활>에, 1977년 6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는 <한국문학>에, 다시 1979년 12월까지 <주부생활>에 실렸다.

1980년에는 집필지를 원주시 단구동 지금의 '토지문학공원'으로 옮긴 후, 자연과 인간의 공생적인 삶에 대해 고민하며 4부의 구상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제4부의 앞부분은 1983년 7월부터 12월까지 <정경문화>에 실렸고, 다시 3년 8개월간 연재가 중단되었다가 1987년 8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월간경향>에 4부의 나머지가 발표되었다.

제5부는 그 후 4년여의 공백 끝에 1992년 9월 1일부터 1994년 8월 30일까지 약 2년 간 607회에 걸쳐 <문화일보>에 연재됨으로써 그 긴 장정의 막을 내렸다.

《토지》는 연재 처음부터 독자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연재가 끝나는 대로 삼성출판사에서 책으로 묶여 나왔다. 1989년에는 박경리 전집을 낸 지식산업사에서 4부까지 개정판이 간행되었고, 1994년 총 16권으로 솔출판사에서 완간되었다. 또한 3부까지의 내용이 두 차례나 드라마로 만들어져 KBS 1TV를 통해 방영되기도 하였다.

《토지》 간행은 근년에 곡절을 겪기도 했다. 1998년 솔출판사에서 출판권을 반납함으로써 근 3년여 동안 구간(舊刊)의 형태로서만 떠돌다가 2002년 원단에 나남출판사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했다.

《토지》는 그 독특한 성격으로 하여 연재되는 중에도 문학계에 다양한 논의를 유발시켰으며, 완간된 후에는 한국문학연구학회 주최로 '《토지》와 박경리의 문학'을 주제로 한 세미나가 개최되는 등 다양한 해석이 시도되었다.《토지》에 관한 비평서만도 이미 여러 권 출판되었고, 전국에서 제출된 석·박사 논문만 수십 편에 이르고 있다.

최근 한 설문조사의 결과는 문학의 모든 장르를 통틀어 세계에 가장 알리고 싶은 우리 문인으로 박경리 선생을, 작품으로《토지》를 꼽았다. 현대문학 전공 교수 등 전문독자 3백 명과 일반독자 3백 명 등 총 600명을 대상으로 한 이 설문조사에서 박경리와《토지》는 각각 60.7%와 58.3%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토지》는 국제적으로도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1983년에《토지》 1부가 일본 문예신서에서, 1994년에는 역시 1부가 프랑스 벨퐁출판사에서, 다음해에 1부가 영국 키건폴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나왔으며, 독일어 번역도 준비중이다.《토지》가 기약하는 마지막 영예는 두말할 것도 없이 노벨문학상 수상일 것이다.

4) 토지의 사항

박경리(68) 씨의 대하소설〈토지〉가 1994년 8월 15일 새벽 2시에 끝났다. 25년 동안, 1897년부터 1945년을, 하동 평사리에서 서울과 간도, 일본을 넘나들며 흘러와 하구에 다다른 대하의 저 '거대한 마침표'는 소설 속에서도 8월 15일(1945년)이었다.

〈토지〉의 마지막 붓끝은 평사리에 돌아온 서희를 따라갔다. 강가에서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딸 양현은, 해당화 옆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어머니 서희에게 다급하게 일본의 패망을 전한다. 그러자 "서희는 해당화 가지를 휘어잡았다. 그리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 그 순간 서희는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작가의 소설 끝내기와 소설의 대단원이 8·15에서 만난 것은 우연이었을까. 8월 15일 새벽, 강원도 원주시 단구동. 한국 소설문학의 산봉우리인〈토지〉의 '점안식'을 마친 작가는 '무심하게' 말했다. "아무런 감정이 없어요. 끝났는지 실감이 나지 않아요. 배만 살살 좀 아프네요." 작가의 낯빛은 무표정했는데, 온화함이 환하게 번져나왔다. 그리고 '끝'이라고 씌어진 마지막 원고지를 아무렇지 않은 듯 보여준다.

" … 외치고 외치며, 춤을 추고, 두 팔을 번쩍번쩍 쳐들며, 눈물을 흘리다가는 소리내어 웃고,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끝." 서희의 몸에서 쇠사슬이 풀려나갔듯이, 그날 작가 박경리 씨의 몸에서〈토지〉는 '끝'자와 함께 풀려나갔다.

〈토지〉의 마지막 1주일 동안 작가의 일상은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새벽 2시에 일어나 원고지 앞에 앉고, 소설이 잘 나가지 않을 때면 무심하게(그는 이 '무심'을 강조한다) 원고지를 바라보다가 가만히 펜촉을 원고지에 대본다. 그러면 문장이 이어진다. 그래도 막힐 때면 부엌으로 가 그릇들을 닦거나, 텃밭에서 따온 고추를 다듬거나 했다. 자랑에 인색한 작가는 유독 이 고추에 대해서만은 자랑을 아끼지 않는다. 누가 가장 기쁠 때가 언제냐고 물어오면 그는 서슴없이 "내가 키운 고추를 잘 말려서 꼭지를 딸 때"라고 답할 정도이다(이때 질문한 이들은 당황한다). 문학보다 삶이 우선이라고 자주 발언하듯이, 그는 고추농사에서 생명의 존엄함과 모순을 깨닫는 것이다. 작가로 나선 이래 그는 늘 일과 글쓰기를 병행했다. 일의 갈피갈피에서 글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것이다. 아침 6시께 다시 살풋 잠에 들었다가 일어나, 많을 때는 열여덟 마리나 되는 고양이와 강아지 세 마리에게 밥을 해주고, 밥짓기와 빨래, 집안청소와 밭일 등으로 분주한 하루를 보낸다. 그 와중에도 틈틈이 서재에 들어가 펜을 잡는다. 저녁에 잠시 텔레비전 앞에 앉는 것이 유일한 휴식시간인데, 깜박거리며 졸 때가 많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작가에게도 대단원을 앞두고 초조했던 적이 꼭 한 번 있다.
작가는 잉크병 뚜껑 때문에 혼이 났다. 연세대 원주분교 국문과에서 선물한 잉크 10병 중에서 8병은 그 동안〈토지〉5부를 쓰느라 다 비우고 2병이 남아 있었다. 둘다 뚜껑이 열리지 않아서 뒤로 미룬 것이었는데 만년필의 잉크가 동이 나려 하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궁리 끝에 뚜껑에다 송곳을 대고 망치로 구멍을 뚫어 빈 잉크병에 옮겨 놓았다. 그때서야 안심이 되었다.
"〈토지〉에는 우연이 참 많았어요." 평사리가 작품의 무대로 결정된 것부터가 우연이었다.
그가 구상하던 토지는 너른 들판과 대지주, 커다란 산과 강을 요구했다. 하동에 있는 친척집에 들렀다가 나오는 차 안에서 그는 무릎을 탁 쳤다. "여기다!"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지리산과 하동, 섬진강과 들판, 그리고 집필에 들어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실제로 평사리에는 조 참판댁이 있었고, 연당과 곳간도 그 집에 '소설처럼' 있었으며 그댁 안주인도 점잖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도 평사리에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그리고 소설과 소설 쓰기의 마지막이 우연하게도 8월 15일에서 끝난 것이었다. 당초에는 8월 10일쯤 완결 지으려고 했다.
그런데 7월 하순 경주에서 열린 문학인 대회와 지독한 가뭄과 무더위, 그리고 낯선 방문객들 (기자들 같은) 때문에 늦어진 것이었다. 굳이 8·15에 맞출 생각은 없었다.
1969년《현대문학》9월호에 연재를 시작한 이래 무려 25년,〈토지〉에는 행방불명된 남편의 그늘, 암과의 투병, 시대의 압력과 정면으로 맞서야 했던 가족사 등이 담겨 있다. 또 저 25년에는, 운명에서 한(恨)의 미학(美學)으로, 문명에서 문화로, 거대한 역사에서 민초들의 자잘한 삶으로, 그리고 드디어는 그 모든 것들을 감싸안는 생명론으로 진화를 거듭한 작가의 정신사 또한 고스란히 용해돼 있다.

외동딸과 함께 생활하던 43세의 작가 박경리는 궁핍했고 외로웠다. 6·25가 나던 해, 서대문 형무소에서 이감되는 도중 행방불명된 남편(김행도 씨)의 그늘에서 겨우 빠져나왔나 싶던 시절이었다. 응용화학을 전공한 남편 김씨는 광복 직후 인천 전매국(나트륨 공장)에 근무하고 있었다. 작가는 "공산주의자라고 말할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용공으로 몰려 사라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토지〉는 6·25 이전 외할머니가 들려준 거제도의 누런 벼와 호열자(콜레라) 이야기에서 촉발된 것이지만, 1956년 김동리 씨의 추천으로 작가가 된 이후에도 계속 유예되고 있었다. 개인사와 시대에 대한 불신으로 구분되는 초기 단편들은 물론이고, 장편〈시장과 전장〉의 도시성과 〈김약국의 딸들〉이 갖고 있는 토속성이〈토지〉에서 하나로 어우러질 것이었으므로 작가의 의욕과 기대는 컸다. 그러나〈토지〉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그는 암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시대적 고통이 마무리되는 순간, 개인적 고통이 들이닥친 것이었다. 암 선고(유방암)를 받았을 때 '소풍을 가는 기분'이라고 말하리 만치 당시의 현실은 그에게 '무거운 바위덩어리'였다. 현실을 놓아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가슴에 붕대를 동여매고〈토지〉를 썼다. 암의 위협으로부터 탈출한 그에게 다시 '시대'가 가로막았다. 남편을 형무소에서 잃은 그는 형무소에 들어가 있는 사위를 생각해야 했다. "보이지 않는 압력 앞에서 엎어지듯이" 한 시대를 견뎠다. 외손자 원보 (김지하 시인의 아들)를 업어 키우며,〈토지〉를 썼다. 그렇게 시대와 팽팽하게 맞섰던 작가는 그러나 당대를 글쓰기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더 거슬러서, 동학의 여진이 남아 있던 구한말로 올라갔고, 돌 하나 풀 한 포기의 생명에도 주목하면서 민족사의 모순이 배태되던 일제 강점기를 '토지'에 하나하나 파종했다. 글쓰기 자체가 곧 당대와의 대결이었으나 눈앞의 상대를 무찌르는 1차원적 싸움이 아니었다. 당대 현실의 앞(일제 강점기)과 뒤(생명론의 미래지향성)에서 감싸안으면서 당대를 극복한 것이었다. 문학비평가들이 말하는 '거대한 모성'(母性)의 발현이었다.
"내가 행복했다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데뷔 직후 조연현 씨의 문학강연회에 갔다가 우연하게 청중들에게 털어놓은 이 말을 박경리 씨는 지금도 번복하지 않는다. "문학은 불행의 편이고, 문학은 끊임없는 단련에서 나온다. 그러나 그 불행을 일부러 자초할 필요는 없다"고 작가는 말한다. '문학보다는 삶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작가·작품의 존엄성도 중요하지만 인간·생명의 존엄성이 더 소중한 까닭이다.

1980년에 그는 원주(原州)로 근거지를 옮겼다.〈토지〉3부 이후 이완된 마음을 다잡자는 각오였다. 흙과 자연에 적응하면서 혼자 서기란 쉽지 않았다. "정릉 시절에는 문학을 위한 문학을 한 듯했다"는 그는 원주에서 생활인으로 뒤늦게 성장했다. 원래의 땅, 본질의 대지로 해석되는 원주에서 그는 한의 미학과 생명론을 단단하게 굳혀나갔다. 1980년대 중반, 사위인 김지하 시인도 '사회인'으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고 손주들도 무럭무럭 자라주었다.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작가는 1930년부터 1938년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진주 형평사 운동과 항일운동에 투신하는 지식인과 민초들의 파노라마를 제4부에 담아냈다. 여기에서 작가는 민족문학의 핵심을 탐사하는 한편 한과 생명사상, 도덕적 민족주의 철학을 심화시킴으로써〈토지〉의 너비와 깊이를 확장해 나갔다.

작가가 말하는 '한의 미학'은 일본의 '원한'과 견줄 때 분명해진다. 우리의 한은 앙갚음이나 보복이 아니다. 한의 정서는 소망이고 그 소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이기도 하다.
그런데 일제 식민지(일본 유학파)의 영향으로 우리 한의 건강하고 미래지향적인 에너지가 일본의 '원한'으로 축소, 왜곡되고 말았다고 박경리 씨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적했다. 그러나 제4부 3편을 쓰다가 작가는 스스로 제동을 건다. 작가는 산문집《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에서 그때를 이렇게 털어놓는다. "4부 3편 8장에서 조찬하가, 유인실이 임명희의 제자인 것을 임명희를 통해 들었는데 그것을 새카맣게 잊었다는 대목은 땜질이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것은 조찬하가 잊은 것이 아니다. 작가가 잊은 것이다." 그는 "시간과 원고료에 대한 과욕이 저지른 이 같은 차질이 참으로 부끄럽다"며 연재를 중단했다. 이 자책(自責)과 반성의 결과는 〈토지〉에 새로운 힘이 되었으리라. 그는 '〈토지〉를 완결하는 것만이 보상하는 길'이라는 각오를 덧붙였다. 작가는 자신의 성격을 편협하다고 말한다. "남의 종이 되기도 싫지만 남의 주인도 되고 싶지 않다"는 말에, 삶에 임하는 그의 자세가 요약된다. 18세에 자신을 낳은 젊은 아버지와의 불화와 어머니에 대한 애증에서 비롯된 강파른 성격은 전후 혼란한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시력으로 변화했고, 그 이후의 고난을 견디게 하는 힘으로 커나갔다.

그러나 절대 자유와 존엄을 지키려는 이 같은 성격은 타인들에게는 불편한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박경리 선생을 처음 만나면 소화불량에 걸린다"라고 말하리 만치 아직도 그에게는 낯선 사람에 대한 껄끄러움이 남아 있다. '타협보다는 죽음을' 이라며 자신의 존엄을 지키려는 성격에서〈토지〉는 태어났지만, 소설은 작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생명에 대한 연민'을 체득한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아직도 '자기 자신에 대한 비정함'은 포기하지 않는다.
이 작가정신을 그는 후배 문인들에게 물려주고 싶어한다. 생명에 대한 연민과 자기 자신에 대한 비정함이 없다면 문학과 예술은 불가능하다는 엄연함을.〈토지〉완간(完刊)이 갖는 의미는 문학의 울타리를 넘어 문화사적인 차원으로 확대된다. 전방위에서 이 작품을 조명하는 학술세미나와 축하잔치가 잇따르는 이유는 오로지〈토지〉와 작가 박경리가 차지하는 비중에서 나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온 한국 대하소설의 뿌리이자 봉우리가 〈토지〉임을 부인할 시각은 그리 많지 않다. 한 작가가 25년에 걸쳐 한 민족의 역사와 문화의 총체를 방대한 부피로 탐사해낸 유례를 세계문학사는 아직 갖고 있지 못하다. 1994년 7월 프랑스에서 나온〈토지〉불어판에 대한 현지의 호평은〈토지〉의 세계적 보편성을 새삼 입증한 것에 다름 아니다. 〈토지〉완간은, 작가가 희망하고 있듯이 우리 전통문화에 바탕한 새로운 문학이론을 정립하는 계기일 뿐만 아니라, 이야기 방식의 변화에 대한 중요한 논점을 던져놓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비롯된 서양의 소설이론으로〈토지〉의 미학은 잘 포착되지 않는다. 예컨대 인물과 사건이 하나의 주제에 종속되지 않고 유기적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또한〈토지〉는 민족문화의 정체성과 그 핵심을 건드리면서 성큼 문학의 범주를 넘어선다. 미래지향적인 한의 미학, 모든 생명은 생명으로서 평등하다는 생명론(生命論)은 한민족뿐 아니라 인류의 미래에 적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 앞에 던져놓고 있다. 박경리 씨는 삶과 사물, 가치와 현상을 바라볼 때 "전후좌우에서 살피라"고 자주 말해왔다. 작가의 이와 같은 주문은 이제〈토지〉에게 그대로 돌아간다.
〈토지〉는 문학연구자와 평론가, 그리고 독자들에 의해 전후좌우에서 평가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토지〉 완간에 대한 헌사(獻辭)들도 수북히 쌓일 테지만, 동시에 차가운 비판도 없지 않을 것이다. '끝'이라고 쓰는 순간 우뚝 선〈토지〉가 가야 할 길은 우선 저 헌사와 비판의 사이이다. 그러나〈토지〉는 그 둘을 어느 사이엔가 품에 안고 우리 문학의 한 핵심적인 길을 열어가며 나아갈 것이다.

5)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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