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부부는 이세상에서 개찹고도 먼 사람"이라고 했건만
그 만큼 서로 조심해야 하는 의미도 있지요.
퇴계이황은 첫번째 부인과 사별하고 두번째 부인을 맞이한
아내가 대학자인 신랑(이황)에게 어울리지 않은 말투와 행동으로 쌍욕을 해대도
차마 눈살을 찌푸리는 말을 지끼데도 ..........
퇴계 이황선생님은 그냥 "손님"처럼 부인을 대 했다 합니다. 에이 마한^^
요즘 우리주변을 보면 아내에게 반말은 물론 막무가네 지낍됩니다.
부애가 나지요. 연애 할때는 오가당도 사주고 갖은 아양을 떨다가......
물론 저도 예외는 아니지요. ㅎㅎ
어젠 회사일로 좀 늦게 술이 취해 집에 들어갔는데 내자(內子)께서 거실에 책을
읽다가 일어나 "오늘도 약주를 마니 더셨네용" ㅎㅎ하면서...
에이 마한 ^^ 무안하게 시리 ~~
혹여나 내가 이런말을 하면 날 보고 친구들이 팔불출이라 불러진 몰라도 솔직히
부부간에 신뢰하고 살아 가려고 애씁니다......
98년도 안동시 정상동 기슭에 약400년이 넘는 무덤을 이장하는 관속에
어느 여인이 쓴 편지글을 소개합니다.
오해가 없길 바랍니다.
"먼저 떠난 남편에게" (글쓴이 미상)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다 머리가가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이 먼저가십니까. 나와 어린 아이는 누구 말을 듣고
어떻게 살아가라는 말입니까?
당신이 나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 왔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 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도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가질까요.
어찌 그런일들 생각하지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셨는지요.
이 편지글을 보면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아내가 남편을 생각하는건 큰 차이가 없는듯 합니다.
1998년 4월 14일 경북 안동에서는 주인을 알 수 없는 무덤 한기를
이장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이 무덤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무덤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무덤을 헤쳐나가자 죽은 남편을 향해 애끓는 사랑과
비통함을 토하는 편지가 나왔습니다. 유물들을 통해 밝혀진 것은
무덤에 묻힌 이가 1586년 31살의 나이로 갑자기 죽은 이응태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응태의 아내 곧 원이엄마는 한지에 한글로 편지를 써서
망자의 가슴에 덮어둔 것입니다.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하얘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시 이 편지가 발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조선판 '사랑과 영혼'이라며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지요.
그런데 무덤에서 나온 한글 편지는 1586년에 쓴 원이엄마 편지보다도 앞선
15C중반~16C전반에 쓴 것으로 보이는 군관 나신걸(羅臣傑)의 편지도
있습니다. “분(화장품)하고 바늘 여섯을 사서 보내네. 집에 못 다녀가니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에 있을꼬, 울고 가네.” 당시 분과 바늘은 매우
귀한 수입품이어서 남편의 아내에 대한 사랑과 식구에 대한 그리움을
알 수 있지요.
또한, 편지에는 16세기에 주로 쓰였던 높임말인 ‘~하소’라고 적고 있어
조선 전기 부부 사이에 서로 높임말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이 한글편지들은 훈민정음이 반포(1446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에 쓴 것으로, 훈민정음이 뜻밖에 이른 시기에 백성 사이에
정착이 되었고 한글 편지가 남성과 여성 사이의 중요한 소통 도구였다는
것을 확인시켜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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