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ㅣ 2019.4.20
도서목록 : 생활의 발견 / 지은이 임어당 / 번역 박병진 출판사 ;육문사
최근 도서목록중에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이 책도 이일수 님으로 부터 추천을 해 주신 책인데 언더라인을 긋고
읽으면 읽을 수록 재미 있더군요 ^^^
먼저 임어당 작가 부터 알자 보자
임어당(1895∼1976)은 상해의 세인트 존슨대학을 졸업한 후 하버드 대학, 라이프치히
대학에 유학하여 언어학을 수학하였다. 귀국 후 북경대학 영어 교수를 거쳐 북경사범대학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불순교수'로 지목되어 북경으로부터 추방당했다. 1926년의 3.18사건
이후는 북경의 군벌정부에 반대하여 아모이〔厦門〕대학으로 옮겼으나, 무한(武漢)혁명정부가
성립하자 참가, 외교부 비서가 되었다. 무한정부 해체 후는 상해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1932년 그는 유머 잡지 '논어'를 창간했으며, 이 무렵부터 그의 기지에 넘친 풍자적
문필 활동이 크게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그후 미국에 건너가 구미인 상대로 중국
문화를 소개하는 저작에 착수 '나의 국토 나의 국민', '생활의 발견', '사랑과 풍자'
등을 영문으로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또 소설 '북경호일(北京好日)', '마른 잎은 굴러도 대지는 살아있다' 등을 써서 항일
운동에 기여하였으며, 국민당을 지지하고 반공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1948년 유네스코 예술부장, 1953년 UN총회 중국 대표 고문, 1954년 남양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임어당의 문명(文名)을 떨치게 한 에세이들은 그의 생활철학과 인생에 대한
체험을 위트와 유머로 재치있게 피력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맹목적인 국수주의에서
탈피하여 세계주의, 즉 어느 민족에게나 공통된 보편적인 삶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으며
미래보다는 현실에 중점을 두는 그의 인생철학은 서정적이며 정통적인 것이다.
정통적이란, 중국 고유의 정통철학에 입각했음을 뜻함인데, 고루하고 진부한 것에는
유머와 냉소로 도전하였으나 진취적인 것에는 고무와 격려로 이를 추진시키고 있다.
인생의 즐거움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 자신의 즐거움, 가정생활의 즐거움, 나무 꽃,
구름, 시내, 폭포 그 밖의 삼라만상을 보는 즐거움, 그리고 또 어떤 형태의 마음의 교류,
시가, 미술, 사색, 우정, 유쾌란 대화, 독서의 즐거움 등이 그것이다.
맛있는 음식, 유쾌한 모임, 가족의 단란, 아름다운 봄날 소풍 등의 즐거움처럼
분명한 것도 있고, 시가, 미술, 자색의 즐거움처럼 그다지 분명치 않은 것도 있다.
이들 두 부류의 즐거움을 물질적인 것이라든가 정신적인 것이라고 부르기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내가 이 구별을 믿지 않으며, 그리고 이렇게 분류하려고
생각할 적마다 당혹스럽기 때문이다. 남녀노소의 유쾌한 소풍 모습 등을 보고
, 그들의 줄거움 중 어느 것이 물질적이고 어느 것이 정신적인지 구별할 수 있겠는가?
한 아이는 풀숲 위에서 깡총거리고, 다른 아이는 들국화를 따서 화환을 만들며
놀고 있고, 어머니는 한 조각의 샌드위치를 들고 있고, 삼촌은 잘 익은 사과를
먹고 있으며, 아버지는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풀 위에 누워 있고,
할아버지는 입에 파이프를 물고 있다.
누군가가 축음기를 틀고 있을 수도 있으며, 멀리서는 음악이나 물소리가 아득히
들려 오기도 한다. 이러한 즐거움 중 어느 것이 물질적인 것이고 어느 것이
정신적인 것이겠는가?
샌드위치를 먹는 즐거움과, 우리가 시정(詩情)이라고 부르는 경치를 감상하는
즐거움에 경계선을 긋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겠는가. 우리가 예술이라 부르는
음악의 즐거움이, 물질적이라 일컬어지는 파이프 취미보다 고급스런 즐거움이라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물질적 즐거움과 정신적 즐거움을 구별한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당혹스러운 일이며, 그런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기도 하거니와 별로
신통치 못한 사고방식처럼 생각된다.
그것은 정신과 육체를 엄밀히 구별하고, 참된 즐거움을 좀더 단도직입적으로
음미하지 않는 그릇된 철학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내 주장이 너무 독단적인
것일까? 또는 인생의 본래 목적은 어떠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논함에 있어
논점의 중심을 잘못 잡고 있는 것일까?
나는 지금까지 생활의 목표는 그 참된 즐거움에 있다고 말해왔다. 사실이 그러니까
그렇다는 것뿐이다. 오히려 나는 '목표'나 '목적'이라는 말을 쓰기를 주저한다.
참된 즐거움을 취지로 하는 인생의 목표나 목적 등은, 인생에 대한 인간 본래의
태도가 어떠한가라는 그런 의식적 목적이 아니다.
'목적'이라는 말은 공부나 노력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당면하는 문제는 이제부터 노력해서 도달해야
할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평균 5, 60년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이 인생 최대의 행복이 발견되도록 인생을 규정해 나가자는
것이라면, 그것은 주말을 어떻게 보낼까 하는 것과 같으며, 광대한 우주의
섭리 속에서 인생의 신비적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아내려는 형이상학적인
명제보다는 훨씬 더 실제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서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대비하는
철학자들은, 처음부터 인생에는 목적이 있어야만 한다고 독단하고 나서기 때문에
논리가 일목요연하지 않다. 서구의 사상가들이 너무나 맹렬히 파고든 이 문제가
오늘날에 중요성을 갖게 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신학의 영향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설계니 목적이니 하는 것을 지나치게 가정한다. 사람들이 이 문제에
해답을 주려고 노력도 하고 논쟁도 벌이지만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이
같은 문제가 매우 헛되며 불필요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인생에 목적이나
설계가 있다면,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그토록 난해하고 막연하며, 귀찮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
문제는 결국 두 가지이다. 즉, 신이 인간을 위해서 정한 신성한 목적 아니면
, 인간이 자기에 대하여 정한 인간적인 목적 중 하나이다.
전자에 관한 한 나는 이 문제에 개입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의 배려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가 자신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 즉, 우리는 신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상상할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능으로써 신의 지능을 추측한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흔히 이 같은 이론의 최종 결과는, 신을 우리 군대의 기수로 삼아 인간과
마찬가지로 맹목적 애국자로 만드는 것이다.
다음으로 후자에 있어서 논점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지, 무엇이어야
하느냐는 것은 아니다. 즉, 실제 문제이지 형이상학적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어야 하느냐는 것에 대해서라면 누구든 자기의 사고방식이나
가치판단을 들고 나올 수 있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항상 논쟁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며, 가치판단이
사람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내 경우는 너무 철학적이 아니고 좀더 실제적이면
족하다. 나는 인생에는 반드시 목적이나 의의가 있어야만 한다는 따위의
억측으로 판단하지는 않는다. "살고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월트 휘트먼도 말한다. 살고 있다. 그것만으로 족하다
. 아마도 아직 수십 년이나 더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인생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문제는 간단해지고, 두 가지의 다른
해답이 나오지 않고 오직 한 가지만이 있을 따름이다.
즉, 인생을 즐기는 것 외엔 인생에 어떤 목적이 있는가.
모든 이교도 철학자에게는 커다란 문제인 이 행복론을 기묘하게도 기독교 사상가들은
등한시하고 있다. 신학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큰 문제는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이 아니라, 참혹한 말이지만 인류의 '구제'라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침몰중인 배 안의 사람들의 심정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꼼짝없이 최후의 운명이라거나, 살아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은가를 생각하는 심정이다. '망해가는 그리스와 로마의 마지막 탄식'이라
일컬어지고 있는 기독교에는 아직도 그 잔재가 남아 있다.
왜냐하면 구제라는 문제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는,
어떻게 해서든지 구제받아 이 세상에 살고 싶다고 하는 문제 속에서는
망각되어 있다. 멸망할 운명이라는 것은 생각하면서도 구제라는 것에 대해 왜
그토록 신경을 써야만 하는 것인가. 신학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구제라는 것에 너무도 열중하여 인생의 행복이라는 걸 별로 생각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에 대해 그들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모두가 그저 막연히 천국이 있다는
것뿐이며, 인간이 거기서 무얼 하며 천국에 가면 어떤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받게 되면, 성가소리가 들리고 백의의 천사가 날아다니고 있다는 극히 막연한 소리를 하는
데 불과하다. 그런데 그중 마호메트만은, 좋은 술과 과일이 가득하고, 검은 머리에 큰 눈을
한 정열적인 처녀들이 놀고 있는 천국의 행복을 묘사하고 있다. 이런 것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천국이라는 것이 좀더 분명하여 확신이 서게 되지 않는 한, 이 지상의 생활에 대한 것까지
잊어버리고 천국에 가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 누군가가 "내일의 씨암탉보다는
오늘의 계란"이라고 말했다. 여름휴가 계획을 세울 때 적어도 우리는 가려는 곳에 대해
이모저모를 알아보게 된다. 이때 관광 안내소가 전혀 아는 것이 없다면 싱겁기 짝이 없다.
그렇다면 아무 곳에도 가지 말고 가만히 있는 편히 낫다.
진보와 노력을 믿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천국에도 진보와 노력이 있다고 믿으리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우리는 천국에서까지 분투 노력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러나 인간은 이미
완전한 존재인데, 어떻게 그 이상 노력하고 진보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천국에서는
그저 무위도식하고만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천국생활을 준비하기 위해서 살아 있는
동안에 무위도식하는 법을 배워 두는 편이 현명하지 않을까?
만일 우리가 한 우주관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면, 모름지기 자아를 잊고 우주관을 인생에
한정하는 짓을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좀더 널리 생각하고, 우리의 생각 속에
바위나 나무나 동물 등 우주만물의 의의까지도 포함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과 사물에는 일정한 짜임이라는 것이 있다(그러나 이 말은 내가 몹시 싫어하는 목표나
목적이라는 말과는 뜻이 다르다). 이 말은 자연과 사물에는 하나의 규범이 있음을 의미하며,
궁극론까지는 못 되더라도 이 온 우주에 대한 어떤 견해에 도달하고, 그후에 우주에 있어서의
인간의 위치를 정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자연과 자연 사이에서의 인간의 위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일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은 자연과 분리시킬 수 없으며,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인간의 격에 합당하지 않은 것을 꾀하여 단번에 결론에 도달하는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천문학ㆍ지리학ㆍ생물학ㆍ역사 등은 모두 우리에게 많은 자료를 제공하여
분명한 사고방식을 안출(案出)시켜 줄 것이다.
조화의 목적을 이처럼 크게 생각한다면 인간의 위치는 다소 빈약해지겠지만, 그런 것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인간에게는 인간의 위치가 있으므로 주위의 자연과 조화 있는
생활을 한다면, 인생 그 자체에 대해 실질적으로 분별 있는 사고방식을 지니게 되며,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행복은 관능적인 것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은 모두 생물학적인 행복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매우 과학적이다.
오해를 살 위험은 있지만 이 점을 좀더 분명히 해두어야만 하겠다. 되풀이해 두지만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란 모두 관능적인 행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유심론자와 유물론자는
언제까지나 서로 오해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양자는 같은
언어로 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말을 하더라도 서로 다른 뜻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도 또한 이 행복보전론
가운데서 유심론자에게 속아 넘어가야만 하는 것일까. 그리고 참다운 행복이란 다만 정신의
행복이라는 것을 승인하기로 하자. 그리고 곧 우리의 논지를 내세워 이렇게 말하도록 하자.
정신이란 내분비선의 기능이 완전히 행해지고 있는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라고.
나에게 있어서는 행복이란 주로 소화가 잘 되느냐 여부에 달려 있는 문제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은 주로 오장 육부의 운행에 달려 있는 문제라고 하며 내가 사회에서
받고 있는 명성이나 존경을 잃지 않도록 하려고 생각한다면 저 미국의 어떤 대학 총장의
소매 밑에서라도 숨어야만 한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는 미국의 대학총장은 신입생의
각 클라스에서 훈시를 할 때면 언제나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곤 했다.
"여러분이 잊어서는 안 될 일이 꼭 두 가지 있다. 즉(성서)를 읽을 것과 용변을 잊지 말 것."
실로 대단한 슬기를 가진 분이라고 생각한다. 총장의 몸으로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니
얼마나 현명하고 온정이 넘치는 분인가. 내장만 제대로 움직이고 있으면 행복한 것이다.
움직이고 있지 않으면 불행하다. 문제는 다만 이것뿐인 것이다.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 말할 때, 추상적인 문제 속에 빠져들지 않도록 해야겠다.
그리고 진정 행복한 때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들 스스로의 손으로 사실에
비추어 해부해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세상에는 행복이라는 것은 소극적인 경우가
굉장히 많다.
다시 말해서 슬픔, 괴로움, 육체적인 고통이 전혀 없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것은 적극적인 경우도 있을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경우에는 우리는
그러한 경우를 환희하고 부르고 있다. 이를테면 가령 내 경우라면 진짜 행복한 한때란
바로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푹 잠을 자고 난 뒤 아침에 눈을 뜨고 새벽의 공기를 마시면 폐가 충분히 부푼다.
그러면 마음껏 깊이 숨을 들이쉬고 싶어하는 가슴게의 피부나 근육에 유쾌한 운동의
감각이 일어난다. 따라서 일도 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드는 한때. 손에 파이프를 들고
의자 웨에 길게 발을 뻗고 있노라면 담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올라가는 그러한 한때
. 여름 여행길에서 목이 타는데, 아름답고 깨끗한 샘물이 있어서 물이 솟아오르는
소리가 흐뭇하게 들려온다. 나는 신발도 양말도 벗어던진 채 펑펑 솟아오르는
그 차가운 물 속에 발을 담근다. 이러한 한 때,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은 다음
안락의자에 기대어 앉는다. 함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마음에 꼭 드는 친구들뿐이다.
두서도 없는 정담이 끝없이 경쾌하게 계속된다. 몸도 마음도 천하태평인 그러한
한 때. 어느 여름날 한낮이 겨워,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검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이 보인다. 15분쯤 지나면 초여름의 소나기가 틀림없이 퍼부을 것
같다.
비를 흠뻑 맞고 싶지만 우산도 받지 않은 채 빗속으로 나가는 것도 어쩐지 쑥스럽다.
그래서 얼른 밖으로 나가 들 한복판에서 소나기를 만난 것처럼 구실을 댄다. 이윽고
흠뻑 젖어서 돌아와 집안 식구들에게는 '허, 그만 비를 만났지, 뭐야' 화고 말하는
그 한때. 어린이들이 재잘거리는 것을 듣거나 그 통통하게 살찐 종아리를 볼
때면 도대체 나는 아이들을 육체적인 뜻에서 사랑하는 것인지, 정신적인 뜻에서
사랑하는지 그런 것을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느끼는 기쁨과 육체가 맛보는 기쁨을 구별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육체적으로 이성을 사랑하지 않고 정신적으로만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 또한 자기가
살아하는 여인의 아름다움 즉 그 여인의 웃음, 미소, 머리를 가누는 모양, 여러 가지
일들을 대하는 태도, 이러한 것들을 해부하거나 하는 것이 남자에게 있어서 그렇게
쉬운 일이겠는가, 결국 어떤 처녀이거나 좋은 옷을 입었을 때에는 보다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입술 연지나 볼 연지에는 여인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또 미용의 지식에서
오는 정신적인 차분함이나 고요함이라는 것도 있다. 이런 느낌은 곱게 단장한 그 처녀 자신에게
있어서는 진실하고 뚜렷한 것이지만, 세상의 정신주의자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이런 심정은
전혀 생각조차도 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육신을 지닌 몸이기 때문에
육체와 정신을 딱 갈라 놓는 차이란, 있다면 정신의 세계에서 높이 평가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감각을 무시하고 그런 상태에 이른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촉각, 청각, 시각에는
도덕성이라든가, 비도덕성이라는 것은 없다.
인생의 적극적인 기쁨을 받아들일 힘이 없어지는 것은 주로 관능적인 감수성이 줄었기
때문이며, 또는 만족스럽게 그것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가능성이란 매우 많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공연한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일까. 차라리 그보다는 재빠르게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서 동서양의 모든 위대한 인생 애호자들의 쓴 글 가운데에서 다소의
문례를 뽑아서 그들이 스스로 즐거운 한때라고 생각하는 순간들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또한 그들이 귀로 듣거나 코로 맡거나 눈으로 보는 그런 소중한 감각과 얼마나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가를 고찰해 보자.
다음에 인용하는 것은 숲의 시인인 도로우가 귀뚜라미 우는 소리를 들었을 때 얻은 시취이며,
굉장히 심미적인 감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선 귀뚜라미가 우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귀뚜라미는 돌틈어가 얼마든지 있다.
한 마리뿐이라면 더욱 흥취가 깊다. 그 울음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무언지 모르게 유장한
놈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승에서의 짧은 동안의 목숨이 다하면, 영원한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 생물의 운명을 생각하기 때문에, 우는 벌레 소리를 유장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한 헛되이 발버둥치며 허덕이는 인간의 번뇌를 생각할 때
그런 느낌도 도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디 온갖 시간의 관념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유장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봄의 욕정이나 여름의
광열이 한창일 때에 홀로 가을의 서늘함과 원숙함을 연상하게 해 주는 것이 있는 것이다.
새를 향해 귀뚜라미는 말한다. "너희들은 어린이들처럼 일시적 충동으로 울고 있구나.
자연은 너희들을 통해서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원숙한 슬기가 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계절의 변화는 없다. 우리들은 4계절의 자장가를 부르는 것이다.
" 그리하여 그들은 노래한다. 풀숲에서 영원한 노래를. 미리 그것이 천국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을 새삼스럽게 끌어올려 천국으로 보내려고 할 필요도 없다. 5월에도
11월에도 영원히 변함이 없다. 안 그런가?
고요한 슬기, 그 노래에는 산문과 같은 확실성이 있다. 술은 마시지 않지만 이슬을
마신다. 교미기가 지나면 사라지는 속절없는 사랑의 선율이 아니다. 신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원히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4계절의 변천하는 테두리 밖에서
그 가락은 진리와 같이 변하지 않는다. 마음이 그지없이 고요하게 맑은 그
마음으로만 귀뚜라미의 울음 소리를 들어야 한다.
휘트먼이 지녔던 후각, 시각, 청각이 그의 정신성을 높이는 데에 얼마만한 힘이
되었는지, 그리고 또한 그가 그러한 감각들을 얼마나 중대시했는지, 다음의
글에서 찾아내어 보라.
아침부터 내리는 눈보라는 온종일 그칠 줄 모른다. 휘날리는 눈을 맞으며 같은 숲,
같은 길을 두 시간 가량이나 나는 걸었다. 바람은 멎었다. 그러나 소나무 사이로 낮은
음악적인 소리가 들려온다. 매우 뚜렷한 이상한 소리, 마치 폭로 떨어지는 소리 같다.
때로는 다시 흘러 떨어지는 듯한 소리, 온갖 감각, 시각, 청각, 후각의 형용하기
어려운 기쁨, 눈은 내려 쌓인다.
상록수, 물푸레나무, 월계수, 그 밖의 모든 나무라는 나무의 수많은 잎과 가지 위에
쌓이고 쌓여 잎사귀는 하얗거나 부풀어 오르고 에머랄드 빛깔의 가장자리에
뚜렷하게 드러난다...... 사방에 빽빽이 들어찬 청암송의 높고 꼿꼿한 기둥......
아려한 송지 냄새가 눈 냄새와 한데 섞인다(냄새가 없는 것은 없다. 눈까지도 향기는 있다.
다만 여러분이 냄새를 맡아 낼 수 있느냐가 문제다. 똑같은 두 장소란 없고 또 시간의
경우에도 한 때와 한 때는 어딘지 다르다. 전혀 같을 수는 없다. 정오와 한밤중, 겨울과
여름, 바람이 부는 한 때와 조용한 한 때, 그 향기가 얼마나 다른가!)
정오와 한밤중의 향기, 겨울과 여름의 향기, 바람 부는 한때와 고요한 한때에서 풍기는
향기를 식별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인가. 시골에서 사는 것보다 도시에서
사는 편이 대개 불쾌하다는 것은 도시의 시각, 후각, 청각의 변화와 뉘앙스가
시골보다 선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디를 바라보나 단조로운 잿빛 담장과 시멘트를 깐 보도 속에 그것들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이른바 흐뭇한 한 때의 참된 한계, 참된 자격, 참된 성질이 어떤 것이냐 하는 점을 따지게
되면 중국인과 미국인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다음 절에서 소개하는 어느 중국 학자가
쓴(유쾌한 한때에 관한 33절)을 번역하여 독자 여러분에게 보여주기 전에 그가 쓴
글과 비교하는 뜻에서 휘트먼의 글 가운데서 다시 대목을 인용할 생각이다.
이 글을 읽으면 중국인의 감각과 닮은 점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맑게 갠 상쾌한 어느 날, 공기는 마르고 바람은 산들거리며 산소로 가득차 있다.
나를 감싸고 나를 녹이는 건전하고 말 없는 아름다운 갖가지 기적들......
나무, 물, 풀, 햇빛, 첫서리...... 그 가운데서 내가 오늘 가장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것은
가을에 특유한 이상할 만큼 투명한 하늘이다. 구름이라고는 크고 작은 흰 구름뿐
조용히 생각에 잠긴 듯이 푸른 하늘을 난다. 아침나절에는 줄곧(아침 일곱 시부터
열 한 시까지라고 할 수 있겠지) 그 빛은 투명하고 생생한 푸른빛이다.
그러나 한낯이 가까워지면 빛은 엷어져 두서너 시간 동안은 마치 잿빛이다......
그리고는 점점 더 빛은 바래서 황혼으로 접어든다...... 커다란 나무가 서있는
언덕 위의 짬 사이로 찬란한 빛을 던지는 낙조를 바라본다. ..... 불꽃의 방사,
장대한 담황색 경관, 그리고 붉은빛이다. 수면에 비스듬히 넓은 은빛 광택......
맑게 가라앉은 그림자, 사광, 섬광, 그림으로도 그려낼 수 없는 선명한 색조.
굉장히 흐뭇한 가을의 몇 시간 동안 분명히 나에게는 그것이 있었다.
무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주로 이 하늘이 있기 때문에 가을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때때로 나는 생각한다. 이 세상에 태어난 뒤로 날마다
하늘을 보지만 제대로 똑바로 참다운 하늘을 본 일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순간들을 더 바랄 나위 없는 유쾌한 한때라고 말할 수 없겠는가.
예전에 읽은 일이 잇는데 시인 바이런은 숨을 거두기 전에 친구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전 생애를 통해서 행복했던 시간이라고 는 단 세 시간밖에 없었노라고
했다고 한다.
이와 똑같은 내용의 임금님의 종에 관한 오랜 전설이 독일에도 있다.
가까운 문밖으로 나가 숲의 나무 사이로 빛나는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면서
나는 바이런과 종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했다. 그러자 자신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었다(매우 즐거웠던 한 때의 기억을
기록해 본 일이라곤 없다. 그런 순간을 맞게 되면 메모를 쓰느라고 모처럼의
아름다운 느낌을 잃게 되는 것이 싫은 것이다.
나는 그저 기분에 맡길 따름이다. 마음내키는 대로 간다. 고요한
황홀감 속에 몸을 내맡긴 채).
그러나 도대체 행복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내가 경험한 것과 같은 그런
순간의 하나를 말하는 것인가. 또는 그것과 비슷한 한 때를 말하는 것인가.
굉장히 미묘하여‥… 삽시간에 사라지는 색조인가, 뭐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마음내키는 대로 알지 못하는 즐거움을 즐기게 해 주소서. 신이여,
당신은 그 투명한 짙푸른 심연 속에 나와 같은 환자를 위한 명약이
있나이까(오, 편안하지 못한 몸의 상태와 마음이 번거로움이 지난 3년 동안
계속되었나이다). 신은 대기를 통하여 나에게 신묘한 명약을 남 몰래 떨어뜨려 주셨나이까.
서
이해와 감상
임어당의 생활철학은 미래보다 현실에 중점을 두고 있다가 지적하여거니와, 그렇다고
이상을 무시한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은 단순한 물질적인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은 이른바 '이상'을 추구하는 마음이기도 한 것이다. 진실로 영원한 것 또는 진실로
절대적인 것은 끝내 인간에게 주어질 수 없는 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현재를
극복해야 할 무엇이라고 믿는 까닭에 보다 나은 삶에 대한 동경을 단념할 수가 없다.
이러한 보다 나은 삶에의 동경과 추구가 그의 모든 에세이를 궤뚫고 있는 기본 테마이다.
이상의 세계를 어떠한 방향으로 구하는가는 각 개인의 성격과 환경을 따라서 여러 가지로
결정될 것이다. 초자연적인 절대자의 힘을 빌려 영원한 것을 잡으려고 할 때 종교적인
이상의 추구될 것이며, 스스로의 인간적인 노력을 통하여 보다 아름다운 지상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꾀할 때는 도덕적인 이상이 추구될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움을
현실의 세계 안에 현실의 개조를 통하여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가상의 세계
안에서 창조하고자 꾀할 때는 예술적인 이상이 추구될 것이다.
이상의 세계를 어떤 방면에서 구하더라도 그 이상의 실현을 위한 노력의 초점이 되는 것은, 또는
그 이상 실현의 전제 조건으로서 요청되는 것은 스스로의 인격의 향상이다. 비록
절대자(신)에 의지하여 구제의 길을 얻으려 할 경우에도 현실적인 노력의 대상이 되는 것은
내 자신의 인격을 향상시키는 일이다. 예술을 통하여 짧은 인생에 긴 생명을 담아 주고자
꾀할 경우에도 내 인격의 향상이 그 바탕이 될 것이다. 예술 방면에 대성하기 위하여서는
비상한 노력이 요구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거니와, 예술작품에 나타나는 아름다움이란
결국 인간 정신 속에 조성된 아름다움의 표현이라는 점으로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이상을 향하여 접근하는 원동력으로서의 내 인격의 무게를 저울질할 때, 그리고 이상
실현의 선결 목표로서 내 인격의 향상을 희구할 때 우리가 또다시 부닥치는 것은
내 사람됨이 어리석고 옹졸함이요, 동물이 인간에 붙어 다니는 가지가지의 제약이다.
우리가 어떤 인격을 '위대하다'고 할 때 그 말이 언제나 똑 같은 뜻으로 쓰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모든 '위대한' 인격에는 적어도 한 가지 특색은 있는 듯이 보이는데,
그 특색이란 상식적인 의미의 '나'에 대한 애착이 지나치지 않다는 것, 즉 대아(大我)의
성품을 지닌다는 점이다.
우리에게는 앞날에 대한 확고한 보장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반드시 이러한
효과가 생기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최선을 다한다 하더라도 뜻하지 않은
불운의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은 언제나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날에 대한 보장이
주어지지 않았다 해서 만사를 될대로 돼라고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운명을 거역할 수는 없음을 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운명에만 내맡길 수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반드시 저러한 결과가 생기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 결과를 지향함이 옳다고 믿는 까닭에 힘을 다하여 그 길을
시험해 볼 따름이다. 시험하던 일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알았을 때 슬픔에 잠기는 대신
스스로의 실패를 웃음으로 바라볼 마음의 여유를 갖는다면 저 인간적인 것 중에도
가장 인간적인 기분인 유머를 즐기게 된다.
20세기의 석학인 임어당은 가난과 절망의 속에서도 언제나 유머는 잃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생활 수기에서 밝히고 있듯이 "내가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할 때, 내 아내가
병이 나서 입원했다. 돈은 완전히 떨어지고, 아내의 물건까지 다 내다 팔아 이제는
끼니조차 어렵게 되었다."고 생활의 고달픔과 어려움을 파악하고 있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스스로의 결단력과 의지, 생활에의 신념과 자부로써 이겨 나가고
있었다. '나'에 대한 사랑이 내 힘의 한계에 대한 인식을 통하여 운명에 대한
사랑으로 발전하여 심기일전의 용기와 신념의 계기를 마련한다. 그것은 사람이
스스로 힘의 한계를 짐작하면서도 꾸준히 할 일을 계속하고, 그 일을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저주대신 사랑으로써 운명을 대할 마음의 여유를 가질 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임어당이 말하는 '서정 철학'이다. 그는 '생활의 발견'을 펴내면서
이 책의 부제(副題)를 '현대생활과 서정철학'이라고 붙이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실은 '나'라는 사람은 철학의 객관성이라는 것을 오히려 경멸하는 자이다. 나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객관적
진리보다는 오히려 사물을 보고 생각하는 방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나는 서정 시적이라는 말을
개성이 강한 독자적 견해라는 뜻으로 해석해서 이 책을 '서정철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
이 책을 집필하는데 나를 가르치고 나에게 조언을 주고, 나에게 힘이 되어 준 몇 사람의
지기지우(知己之友)가 있다. 즉 8세기의 백난천, 11세기의 소동파, 16세기 및 17세기의
독창적인 인물의 대집단, 그리고 로맨틱하고 쾌변가(快辨家)인 도적수(屠赤水),
놀기 좋아하고 독자적인 원중랑(袁中郞), 민감하고 쾌변가인 장조(張潮), 엉터리
수작을 잘하는 해학가며 흥분가인 김성탄(金聖嘆)……이 모두가 인습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로운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지기지우라기보다는 내가 스승으로 섬기는 사람들로 장자가 있고 도연명이
있다. 나는 때로 이런 인물들의 말을 직접 인용하기도 했는데, 그러나 내가 내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때에도 사실은 그들 선철(先哲)의 대변(代辯)을 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또한 한 사람의 중국인으로 서뿐만 아니라 근대 생활을 영위하는
한 근대인으로서도 이야기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듯 '인습에 사로잡히지 않은 자유인들'의 모습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삶의
슬기를 찾고 있다. 그것이 곧 유머감각을 터득하고 여유의 멋을 일깨워주는
서정 철학이 아니겠는가. 임어당은 말한다. "보다 중요한 현실주의로 이상주의를
억제할 수 있다는 그 점이다."
참고 자료
임어당(林語堂) 린위탕 (1895-1976)
중국의 소설가 ·문명비평가.
원이름은 위탕[玉堂]. 푸젠성[福建省] 룽치[龍溪]의 가난한 목사 집안 출신.
상하이[上海]의 성 요한대학[聖約翰大學] 졸업 후 베이징 칭화학교[北京淸華學校]
영어교사가 되었다. 1919년 하버드대학에 유학, 언어학을 공부하고 독일로 건너가(1921)
예나, 라이프치히 두 대학에서 수학했다.
1923년 귀국하여 국립 베이징대학 영문학 교수가 되었는데, 음운학(音韻學)을 연구하는 한편
루쉰[魯迅] 등의 어사사(語絲社)에 가담하여 평론을 썼다. 1926년 군벌정부의 탄압을 피하여
아모이[厦門]대학 문과 주임, 이듬해 우한정부[武漢政府]에 가담하여 그 외교부 비서가 되었다.
1932년 유머와 풍자를 주장하는 《논어》, 1934년 소품문지(小品文誌) 《인간세(人間世)》
등을 창간, 소품문을 유행시켰으며, 1935년 평론집 《나의 국토 나의 국민 My Country and
My People(我國土我國民)》을 쓰고, 이듬해 영국으로 가서 《생활의 발견 The Importance
of Living》(1938) 등으로 중국문화를 소개하였다. 소설 《Moment in Peking(北京好日)》
(1937) 《폭풍 속의 나뭇잎 A Leaf in the Storm》(1941) 등에서는 근대중국의 고민을 표현하였다.
영문 저작으로는 모국문화의 옹호, 중국문으로는 모국의 속물성(俗物性)을 풍자하였으며,
뛰어난 세계문화 창조에는 상식 ·이성(理性)·생활감정 등을 교묘하게 조화하는 중국정신이
유효하다는 주장은 미래소설 《The Unexpected Island》(1955)에도 잘 나타나 있다.
자유주의자로 불리며 세계정부를 제창하였다. 1970년 6월, 제37차 국제 펜클럽 대회
참석차 한국에 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