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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취미활동(挑戰)/▶인문학공부(人文學)

서정욱/ 세계가 놀란 한국핵심산업

by 사니조아~ 2024. 1. 20.

일시 : 2019.7.13
책제목 : 세계가 놀란 한국 핵심산업기술

수년전 일본 여행중에 만난 서정욱(HL1BX)박사님과 인연이 되어 간간히 800으로 통화하면서

'세계가 놀란 한국 핵심산업기술' 서적을 소개 해 주셨습니다.  마치 알라딘에 제고가 14권이

독자들에게 있다고 하여 주문을 하주 헐 값에 매입을 했습니다.

택시 기본요금보다 싼 가격이니 저는 그런 좋은 기분으로 책을 구매합니다.

우리가 일고 있는 것은 지식인데 정말 기술도 없고 물자도 없고 그렇다고 돈이 많은 나라도

아닌데 자동차 반도체 정보통신분야  토목 기술력 등등 얼마나 무궁 무진합니까?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 핵심산업 4강의 생생한 성장 발전사. 철강 · 자동차 · 반도체 ·

이동통신(CDMA) 산업의 발전사를 통해 21세기 또 다른 신화를 꿈꾸는 첨단 공학 기술의

미래를 본다 우리는 이 분야에 선두가 되었습니다.

철강- 이구택(POSCO 사장)
서울대학교 금속공학과를 졸업하였고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에 입사하여 경영정책부장과

포항제철소장을 지냈다. )포스코의 대표이사(사장)를 지내신 분입니다.

1999년 제32회 과학의 날을 맞아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ㅇ이 파트는 한국철강산에 기초가 되어 발전하면서 성장하고 특히 포항제철 광양제철

한보철강 부도로 인해 정경유착으로 인한 imf사태에 그 어느구두도 책임이 없다고 하는것에

분노가 치 민다.

 

 정말 철강이 발전 되기까지 기술적 투자적 차관을 빌리며 함께 했던 일본 선진국에겐

고마운 일이다. 운수 산업이 발전 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있을때 철강과 전쟁은 끝임 없는

폭탄인것 같아요^^

우리 철강은 우리나라 경제산업에 엄청난 발전을 해 온것은 사실입니다.

철이 없었드라면 우리인간도 사나운 짐승등에 제압을 당할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포항제철의 건설과정을 보면, 흔히들 쉽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어려운 ‘無에서 有를 창조’한
하나의 표본으로 불 수 있다. 그만큼 건설당시의 우리나라 사정이 어려웠고, 외국으로부터의
원조나 지원도 후진국의 입장에서 간단치 않았다는 얘기다 朴正熙 정부 아래서 포철 건설계획은
 여러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친다.

박 대통령의 구상아래 1964년 12월의 ‘철강공업종합육성계획’이 확정되고 부지조성 등의 계획이 추진되지만, 문제는
 건설자금. 우리 자체 형편으로는 마련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도움을 청할 곳은 국제사회였고, 그렇게 해서 1966년
 12월 설립된 것이 ‘對韓국제제철차관단(Korean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 KISA)이다. 미국의 코퍼스社가 중심이
 돼 서독의 데마그와 지멘스, 영국의 웰먼, 이탈리아의 임피안티, 그리고 프랑스의 엥시드 등 5개국 8개 제철회사가
 컨소시엄 형태로 참여키로 한다.

KISA는 한국의 종합제철공장을 건설하기 위한 자금으로 차관단이 1억 달러, 한국 측이 2천500만 달러를 마련키로 한다.
 KISA는 종합제철의 규모를 粗鋼생산 연 50만 톤, 그리고 확장 100만 톤으로 잡는다. 그러나 국제연합개발계획(UNDP)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생산규모를 조강 연산 60만 톤으로 시작해 최종적으로 300만 톤까지 확장키로 합의하면서 공장건설
 계획이 잡혀진다. 건설은 당시 朴泰俊씨가 사장으로 있던 대한중석이 맡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포항제철 공업단지
기공식이 열린 게 1967년 10월 3일이다.

그러나 포철 건설은 부지조성 작업이 진행 중인데도 차관이 확보되지 않아 난항이 조성된다. KISA가 마련한 차관은
 4300만 달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대한 지원보다는 자기들의 설비 판매에만 급급하던 KISA 소속 외국회사들의
 소극성 때문이다. 다급해진 박정희 정부는 미국 수출입은행이 책정해 놓은 1969년도 對韓차관 일부를 우선적으로
종합제철 사업자금으로 사용키로 하고 요청을 했으나 퇴짜를 맞는다. KISA와 IBRD(세계은행)의 부정적인 견해 때문이었다.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내놓은 사람이 박태준 당시 포철 사장이다. 그는 1969년 1월 외자 확보를 위해
미국 방문에 나섰지만 결실을 거두지 못한 채 귀국해야 했다. 낙담 속의 귀국길 하와이 백사장에서 그를 사로잡은
발상은 바로 일본이 한국에 주기로 한 對日청구권 자금이었다. 농림수산부문에 투자하기로 예정된 청구권 자금이
 있었는데, 이것을 종합제철 건설자금으로 전용하면 안 될까하는 생각이 퍼뜩 든 것이다.

1964년에 박태준은 韓日국교정상화의 막후에서 밀사역할을 하면서 일본의 정계 요인들을 두루 만난 적이 있었다.
 일본이 한국에 주기로 한 무상자금 3억 달러 중 그 때까지 적어도 반은 남아있을 것이다. 이 돈을 쓰는 방법을
 강구해보자는 발상이었다. 그는 즉시 여장을 꾸려 일본으로 향한다. 그리고 이를 성사해 낸 후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박 대통령도 적극 힘을 보탠다. 이렇게 해서 포항제철의 건설자금이 마련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박 대통령은 포철 건설의 방향 전환을 모색한다. 우리 자체의 案을 바탕으로 자주적으로 추진한다는
게 그 요지다. 박 대통령은 이와 관련해 1969년 6월 경제기획원 내에 ‘종합제철사업계획 연구위원회’를 설치한다.
박 대통령의 이런 의지는 “종합제철소 건설계획을 외국기관에게 일임하고 결과만을 기다리는 자주성 없는 태도를
지양하고 우리 자체의 案을 만들고 입증자료를 제시해 외국 투자기관을 설득하라”는 당시의 지시사항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이와 함께 “이미 추진 중인 항만·도로· 부지 조성공사를 계속해서 강력히 추진하고
종합제철이 국제경쟁력을 갖출 때까지 정부투자를 정부보조로 전환시킬 것”을 지시함으로써 자주적 힘과 시각을
 바탕으로 한 포철 건설을 역동적으로 추진한다.
 

포철 관계자들은 박 대통령의 이런 의지와 노력이 포철의 성공을 예약한 계기로 보고 있다. 만일 KISA의 계획대로
 포철이 건설됐더라면 부실기업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을 것이란 견해다. KISA가 한국의 사정과 시각을 도외시하고
 계획한 연산 60만 톤 규모의 제철소로는 채산성을 얻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KISA의 계획으로는 공장의
추가확장이 곤란하고 설비는 노후된 것이다. 그리고 초기투자는 적게 들지 모르지만 적정 경제규모로의 확장이
 불가능했다.
 
KISA는 한국 철강 산업에 대한 지원이나 경제적 운용성보다는 그들의 설비 수출 등 편협한 이해관계에만 몰두했었다는 지적이다.
1973년 7월 3일 포철의 1기 설비종합준공식이 있던 날, 우리나라 중화학공업 건설의 첫 물증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낸다.
1970년 4월 1일부터 외자 711억 원(1억7천800 달러), 내자 493억 원, 총 1천204억 원을 들여 건설한 103만 톤짜리 제철공장이
 건설된 것이다. 포철 건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단연 박정희와 박태준이다. 혹자는 박정희를 연출자로,
 주연배우를 박태준으로 꼽기도 한다.

1969년 12월 포철 공사현장에서 박태준은 황량한 모래벌판에서 사원들 앞에서 이렇게 외쳤다. “우리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입니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걸고 일해야 합니다. 실패란 있을 수 없습니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박정희는 박태준의 이런 열정과 노력에 날개를 달아준 사람이다.
그는 박태준에게 ‘종이마패’를 준 적이 있다. 박태준이 포철 건설 중 부닥치는 여러 어려운 일에 써 먹으라고 준 친필서명의 메모다.
박정희의 이런 전폭적인 지원이 박태준으로 하여금 포철을 건설 과정에서부터 정치와 행정의 견제나 간여로부터 지켜갈 수
있게 했을 것이다

자동차 - 김천욱(연세대 기계공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기계공학과를 졸업했고 미국 플로리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원자로설비 안전문제와 자동차 형식승인 등을

자문하였다.

반도체 - 최영락(과학기술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임학과를 졸업했고 덴마크 Roskilde 대학에서 기술정책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연구 분야는 과학기술 발전 중장기 계획 및 한국의 과학기술

무엇보다도 삼성전자는 선진국을 조기에 따라잡기 위하여 "병렬적 개발 시스템"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물론 이 시스템은 반도체회사들이 일반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삼성은 신제품 개발시 몇 가지 병렬적 개발 시스템을 시행하였다. 첫 번째 유형은

 동시 다발적으로 여러 개의 신제품 개발팀을 진행시킨 점이다. 예를 들면 1M · 4M ·

16M D램 개발팀을 동시에 운영하여, 한 팀은 대량 생산을 위한 노하우를 개발하고

 다른 한 팀은 기본적인 공정 기술을 개발하며 또 다른 팀은 신제품의

기본 구조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게 된다.

두 번째 유형은 한국의 본사와 미국의 해외 연구소에서 동일한 제품을 병행하여

 개발하는 것으로, 이들은 상호 보완적 혹은 경쟁적으로 신제품을 개발하곤 한다.

256K · 1M · 4M D램 모두 본사와 해외 연구소에서 그 개발을 병행하였다.

 세 번째 유형은 신제품의 개발과 대량 생산 라인의 건설을 병렬적으로

 추진하는 것이다.

특히 64K와 256K D램과 같은 초기 제품을 개발할 때 이러한 활동이 두드러졌다.

 즉 "연구 개발은 연구 개발이고, 생산은 생산이다." 라는 기치 아래 대량 생산 기술의

개발을 종료하기 이전에 생산 라인의 건설에 착수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유형의

 병렬적 개발 시스템을 요약하여 아래의 표에 나타내었다.

이동통신(CDMA) - 서정욱(한국인정원 회장, 전 과학기술부 장관)
서울대학교 전기공학과를 졸업했으며, 텍사스 A&M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KT부사장,

KIST원장, SK텔레콤부회장을 지냈으며, 금탑산업훈장, 전자대상, 정보통신대상 운경상,

NAEK대상을 받은 바 있다.  한국인정원 회장, 세계인터넷청소년연맹 총재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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