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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산정(山情)/▶가을 (秋) 산행

계룡산

by 사니조아~ 2023. 5. 9.

일 시 : 2010.10.10

대상산 : 계룡산 관음봉 816M

코 스 : 동학사=> 관음봉=> 능선=> 남매탑=> 갑사

주 관 : 현대차 산악회 제444회 정기산행

참석인원 : 32명  가족 및 회원

 

울산을 아침7시 출발 동학사에 도착하니 오전10시30분 동학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청년시절 친구가 대전에 군 지휘관으로

근무 할시 고향 친구 셋이서 들린 동학사이다.   주봉인 천황봉은 845M이며  관음봉의 높이는  그 보다 적은 816M이다.

 

약3시간 이상 버스로 이동하여 동학사 주차장에 도착 했다. 약 20년 넘게 찾아 온 동학사 청년시절이였니 더욱 더 감회가

깊다. 난 천황봉 보다 천년 고찰 동학사 갑사가 있는 계룡산 관음봉으로 능선을 타고 내려오는 등산로가 국립공원이다.

 

포항 산악회에서 많은 산님들이 온 관계로 한때 등산로는 인산인해 요즘 산행을 하다 보면 여성분들이 산행대장을

하는 경우가 종종 본다. 무전기를 들고 지휘를 하고 산행 조율을 통해 사전 등산로를 안내 하는 경우다.

 

관음봉에 올라서니 점심시간이다. 약12시 전후를 통해 우리일행도 1공장 유순금님과 또 한분의 점심식사를 같이 했다.

인원이 많은 관계로 다 함께 식사할 공간을 확보하기 어려워 다 같이 못한것이 아쉽다.

울산의 신불산 공룡능선 처럼 생긴 능선이 장관이다.

 

 

계룡산은 높이는 845m이다. 주봉인 천황봉을 비롯해 연천봉·삼불봉·관음봉·형제봉 등 20여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졌으며,

전체 능선의 모양이 마치 닭볏을 쓴 용의 형상을 닮았다 하여 계룡산이라고 불린다높이는 845m이다. 주봉인 천황봉을

비롯해 연천봉·삼불봉·관음봉·형제봉 등 20여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졌으며, 전체 능선의 모양이 마치 닭볏을 쓴 용의

형상을 닮았다 하여 계룡산이라고 불린다

 

남매탑은 계룡산 남매탑(男妹塔)은 동학사(東鶴寺)에서 북쪽으로 약 2㎞ 지점에 위치하며 오뉘탑, 청량사지쌍탑

(淸凉寺址雙塔)이라고도 한다. "청량사(淸凉寺)"는 재명와편(在銘瓦片)의 출토에 의하여 확인된 절로 이 절이 언제

창건되어 언제 폐사 했는지는 정확한 문헌이 없어 알 수 없다.



그러나 남매탑의 건축양식으로 볼 때 청량사는 백제 말에서 통일신라초에 실제 존재한 절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절터에는

 계명정사라는 암자가 있으며 주변의 옛 절터는 밭(田)으로 경작되고 있다.


남매탑에는 탑에 얽힌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패망(敗亡)하자

백제의 왕족 이였던 한 사람이 계룡산으로 들어와 현재 남매탑이 있는 청량사지 터에서 스님이 되어 한 칸의 초암을 짓고

 수도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스님이 신라 선덕여왕 원년에 당나라에서 입국한 상원스님이다는 설도 있다.)



스님은 나라 잃은 설음을 모두 잊고 부처님에게 귀의하여 여생을 보내고자 하루하루를 불공을 드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계절은 겨울로 접어들어 밖에는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이 좌선을 하며 삼매에 들어

 있는데 밖에서 큰 동물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님이 몸을 푼 후 밖을 나가보니 송아지 만한 호랑이가 입을 쩍 벌린 채 고통스러워하며 시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스님이 가까이 가보니 호랑이가 동물을 잡아먹다가 갈비뼈가 목에 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 이였다.



스님은 호랑이에게 "네가 살생한 까닭으로 이렇게 고통을 받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호랑이 목에 손을 넣어 갈비뼈를

 빼주었는데 호랑이는 연신 고마운 몸짓을 하며 숲 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호랑이는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간혹

 나타나 산돼지도 물어다 놓고 노루도 물어다 놓고 가곤 했다. 스님은 호랑이가 동물들을 물어다 놓자 "내가 그토록

살생을 하지 말라고 했거늘 또 살생을 했단 말이냐?"하며 호랑이를 크게 꾸지졌다.



그리고 나서 몇 일이 지난 어느 날 밤, 스님이 불공을 드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밖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님이

 밖을 나가 주위를 살펴보니 이게 웬일인가.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에 아리따운 묘령의 여인이 쓸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여인의 머리에 가르마가 단정하게 드러나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제 갓 시집온 처녀 같았다.



이 깊은 밤 산중에 묘령의 여인이 무슨 연유로 이곳에 와 있단 말인가? 스님은 의아스럽게 생각하면서 여인을 초암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정성을 다해 극진한 간호를 했다. 그러자 여인이 이내 정신을 차렸다. 스님은 여인이 의식이 돌아오자

여인에게 야밤에 이 곳에 온 연유를 물었다. "낭자는 뉘오신대 이 깊은 밤에 산중에 와 계신 것입니까?"



그러자 여인은 공포에 질려 떨고 있었으며 겁에 질린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스님이 여인을 가까스로 안정시키

자 그녀는 비로서 입을 열었다. "소저는 경상도 상주 땅에 사는 처자이온데, 혼기가 되어 이웃 마을 양반 댁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첫날밤에 들기 전에 소피가 마려워 잠깐 밖을 나왔다가 갑자기 송아지 만한 호랑이가 앞에

 버티고 있는 것을 보고 혼비백산(魂飛魄散)한 끝에 그만 정신을 잃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바로 이

곳이옵니다."



여인은 결혼 첫날밤에 소피를 보려 나왔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이 곳까지 오게 된 것 이였다. 이 때부터 여인네들은 밤에

 화장실 가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방에서 일을 보기 위하여 요강이 생겨났다고 한다. 스님은 여인을 초암에서 며칠 머물게

 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였으나 여인은 말하기를 "고향에서는 이미 죽은 목숨이온데 이 몸으로 어찌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며 "스님께서 저를 구해 주셨으니 저는 스님을 평생 지아비로 모시겠나이다." 하며

청혼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스님은 "나는 불제자인데 어찌 여인과 혼인 할 수 있겠소." 라고 거절하며 그대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오누이처럼 같이 살아가자고 하여 오누이로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비구, 비구니로서 수행을 하다가 말년에 한날 한시에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 이들 두 사람이 세상을 뜨자 사람들은 두 사람의 아름다운 행적을 후대까지 기리고자 석탑 2기

를 쌓고 남매탑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재미 있지요?

 

갑사로 가는 길 고등학교 교과서에 게재 된 '갑사로 가는길' ^^

 

지난간 글 귀이지만 쓰 보기로 했다.

지금은 토요일 오후 동학사엔 함박눈 이 소록 소록 내리고 있다. 대로 단장한 콘크리트 사찰은 솜이불을 덮은 채 잠들었는데

관광버스도 끊인 지 오래다. 등산복 차림으로 경내에 들어선 사람은 모두 우리 넷뿐, 허전함조차 느끼게 하는 것은 어인일일

까?

 

대충 절 주변을 살펴보고 갑사로 가는 길에 오른다. 산 어귀부터 계단으로 된 오른막길은 산정에 이르기까지 변화가 없어

팍팍한 허벅다리만 두들겼다. 그러나 , 지난 가을에 성장을 벗은 뒤 여윈 몸매로 찬바람에 떨었을 나뭇가지들이 보드라운

밍크 코트를 입은 듯이 참스러운 자태로 되살아나서 내 마음을 다사롭게 감싼다.  

 

흙이나 돌이 모두 눈에 덮인 산길을 도란 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오르는 우리들은, 마치 북국의 설산이 라도 찾아간듯한

아취에 흠씬 젖는다 원근 을 분간 할 수 없이 흐릿한 설경을 뒤돌아 보며 정상에 거의 이른 곳에 한일자로 세워 놓은

계명정사가 있어 배낭을 풀고 숨을 돌린다. 뜰 좌편 가에서는 남매탐이 눈을 낮으며 먼 옛날을 이야기 해 준다.

 

때는 거금 천 사백 여년전 신라 선덕여왕 원년인데 당승 상원대사가 이 곳에 와서 움막을 치고 기거 하며 수도 할 때도

있다. 비가 쏫아지고 뇌성벽력이 천지를 요동하는 어느 날 밤에, 큰 범 한마리가 움집 앞에 나타나서 아가리를 벌렸다.

대사는 죽음을 각오 하고 눈을 감은 채 염불에 만 전심하는데 범은 가까이 다가 오며 신음하는 것이 였다. 대가가 눈을

뜨고 목 안을 보니 인골이 목에 걸려 있었으므로 뽑아 주자 범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여러 날이 지나 뒤 백설이 분분하여 사방을 분간 할 수 조차 없는데 전날의 범이 한 처녀를 물어다 놓고 가 버렸다

는 전설이다. 대사는 정성을 다 하여 기절한 처녀를 회생시키니 바로 경상도 상주읍에 사는 김화공의 따님이였다.

집으로 되돌려 보내고자 하였으나 한 겨울이라 적설을 헤치고 나갈길이 없어 아듬해 봄까지 기다렸다가 그 처자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전후사를 갖추어 말하고 스님은 되돌아오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김처녀는 대사의 불심에 감화를 받은 바요 한 없이 청정한 도덕과 온화하고 준수한 풍모에 면모의 정까지

골수에 박혔는지라 그대로 떠나 보낼수 없다 하여 부부의 예를 갖추어 달라고 애원하지 않은가>

 

 

김화공 또한 호환에서 딸을 구원해 준 상원스님이 생명의 은인이므로 그 음덕에 보답할 길이 없음을 안타까와 하며 자꾸

만류 하는것이 였다. 여라 날과 밤을 의논한 끝에 처녀는 대사와 의 남매의 인연을 맺어 함께 계룡산으로 돌아와 김화공의

정재로 청량사를 새로 짖고 암자를 따로 마련하여 평생토록 남매의 정으로 지내며 불도에 힘 쓰다가 함께 서방정토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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