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나이들어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지가 않아 움츠려
들지만 한 때는 우리나라의 많은 산을 오르내렸다.
국립공원 1호인 지리산과 설악산 등, 이름값을 꽤나
하는 명산부터 전국 각지에 숨어 있는 산까지 지도
한 장만 달랑 들고 구석구석 찾아 다녔다.
세월의 뒤켠으로 밀려간 옛길과 스러져 가는
산촌 부락도 설레임과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런 저런 제약이 많은 국립공원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편이라 찾은지가 꽤 오래 되었다.
입산 시간에 맞춰 꼭 지정된 산길만 걸어야 하고
야영도 금지다.
또한 주말과 봄,가을 시즌이면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러다보니 애초 그 산이 지닌 자연의 정체성과 호젓함은
사라지고 북적이는 시장터처럼 소란스럽기만 하다.
하긴 많은 탐방객들이 찾으니 자연 환경보호와 안전상
문제로 어쩔 수 없는 조치이겠다.
다녀 본 중 우리나라 산 중에 어느 산과 걷는 길이 제일
마음이 가느냐고 나에게 물으면 서슴없이 방태산과
월둔에서 아침가리를 잇는 옛길이라고 말한다.
여느 산보다 방태산(1,444m)은 높기도 하겠으나 가진
품이 넓고, 정상에 오르면 첩첩산중으로 문명의
이기(利器)가 없다.
산 아래 마을의 불빛도, 자동차도, 송전철탑도 전혀 보이지
않는 오로지 산 속에 산 뿐이다.
그만큼 자연 그대로 보전된 산이다.
월둔~명지가리~방동으로 잇는 20km 거리의 옛길도
적막강산으로 고즈넉하기 이를 데 없다.
이곳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재앙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왔다.
삼재불입지처(三災不入之處)로써 난세에 숨어 살만한
피난처라고 <정감록>은 기록하고 있다.
그야말로 무인지경이다.
볕 바른 산비탈에도 집 한 채 없다.
그저 더 우뚝해진 산과 깊숙해진 골짜기 사이로 손바닥만한
하늘만 빼꼼이 열려 있다.
사방을 둘러봐도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해발 1000미터를
넘는 고봉들과 맟닿은 산줄기 뿐이다.
일찍이 길은 이렇게 사람의 필요에 의해 사람이
다님으로써 태어난다.
세월이 흘러 사람이 사라지면 길도 사라진다.
그렇게 사라져가는 옛길을 걷다보면 적막감과 외로움이
걷는 길 위에 가득차 있다.
창문 밖에는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다.
여름엔 마른 장마이더니 요즘 사흘이 멀다하고
추적추적 내린다.
속절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지금 산에서 비를
맞고 걷는 이를 잠시 생각해 본다.
이 비가 걷히면 한층 더 가을이 가까워 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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