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08.5.20
제목 : 프라하(Prague Spring) 봄
체코 프라하의 밤 거리는 황홀하다. 그러니까 제2차 세계대전후 1948년의 이른바
2월 사건,1968년 1월의 ‘프하하의 봄’으로 부르는 자유화운동이 소련 등 바르샤바
조약군(軍)의 침입으로 짓밟힌 역사적인 사건의 무대가 되었다. 1993년 1월 1일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어 체코의 수도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먄 공업도시로서의 프라하에는 100여 개의 기업이 있고 전국 공업생산의
10% 가량을 생산합니다.
기계공업발전 되어있고, 국영기업의 CKD(전기기관차 등)와 테슬라(모터·방송관계)
등있으며 인쇄공업도 발전되어 있다, 그리고 오스트라바에는 현대자동차공장이
있다. 우리 현대차 직원도 약70여명이 주재원으로 근무를 하고 있답니다.
유럽철도의 대중심지로 유럽의 각국과 연결되며 하항(河港)이다. 시는 10개의 구(區)로
나누어져 있으며 교외지역으로 계속 발전하고 있다.
영어·프랑스어로는 프라그(Prague), 독일어로는 프라크(Prag)라고 한다. 체코 중서부,
불타브강 (江:몰다우강) 연변, 라베강(江:엘베강)과의 합류점 가까운 곳에 있다. 체코
최대의 경제·정치·문화의 중심도시이다. 시내를 흐르는 블타바강은 너비가 100~300m이며
몇 개의 강이 있다.
비교적 따뜻하며 습도가 낮고 연 강수량은 508mm이다. 프라하분지에는 BC 4000년경부터
사람이 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슬라브인(人)이 들어온 것은 5·6세기로 9세기 말에
성이 축조되었다.
11세기에는 구(舊)시내 광장에서 교역이 시작되었고 12세기에는 이미 중부유럽 최대의
도시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14세기에 이르자 카렐 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시는 더욱 발전하여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당시의 인구는 4만으로 추정된다. 14~15세기에는 후스의
싸움터가 되었다.
15~16세기에는 고딕 건축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정치적인 의미는 상실하였다. 17세기에는
바로크 건축이 번성하였고 18세기 말부터 다시 수공업 등이 일어나 경제적으로 회복되어
인구도 8만을 헤아렸다. 그 후에도 인구는 늘어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帝國) 최대의
공업도시로 성장하였다.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한 이래 수도가 되어왔다.
1956년 소련에서 벌어진 스탈린 격하운동 이후에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스탈린주의자인
노보트니 정권이 지속되었다. 이에 국민의 불만이 높았으며, 자치권을 제한받던 슬로바키아
민족의 감정도 악화되었다. 이 상황에서 1968년 1월 총회를 통해 노보트니는 사임하고
개혁파인 두프체크가 당 제1서기를 맡았다.
개혁파는 4월에 열린 총회에서 강령을 채택하였다. 내용은 재판의 독립, 의회제도의 확립,
사전검열제의 폐지, 민주적인 선거법제도의 창설, 언론·출판·집회의 자유 보장 등이다.
개혁을 통해 한동안 '프라하의 봄'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체코 사태가 동유럽으로 파급될
것을 우려한 소련군은 1968년 8월 20일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다. 이로써 프라하의
봄은 끝나고 1969년 4월 후사크가 당 제1서기가 되었다.
체코 사태라고도 한다. 1956년 소련 내에서 흐루시초프에 의한 스탈린 격하운동이 일어난
후에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스탈린주의자인 노보트니 정권의 보수정책이 계속되었고,
1960년대의 정체된 경제에 대해 국민의 불만이 높았으며, 자치권을 제한받던 슬로바키아
민족의 감정도 악화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968년 1월 총회에서 노보트니가 당 제1서기를 사임하고 개혁파인
두프체크가 그 자리를 맡아 국가 주요요직에 개혁파를 임명했으며, 4월에는 다음과 같은
행동강령을 발표했다.
① 재판의 독립, ② 의회제도의 확립, ③ 사전검열제의 폐지, ④ 민주적인 선거법제도의 창설,
⑤ 언론·출판·집회의 자유 보장, ⑥ 국외여행·이주의 자유보장, ⑦ 경찰정치의 종식,
⑧ 공업·농업 부문의 개혁 ⑨ 체코 슬로바키아의 동등한 권리에 의한 연방제 이행,
⑩ 자주독립에 대한 대외정책 추진, ⑪ 과거에 권리를 박탈당한 모든 시민의 완전한 복권 등이다.
두프체크는 이와 같은 개혁조치를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고 했는데, 언론·집회·출판
등이 자유화되면서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잠시 동안의 '프라하의 봄'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 사태가 동유럽으로 파급될 것을 우려한 소련군은 1968년 8월 20일
브레주네프 독트린을 앞세우고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5개국군 약 20만 명으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해, 두프체크를 비롯한 개혁파 지도자들을 소련으로 연행했다. 이로써 프라하의 봄은 끝나고
1969년 4월 당 제1서기가 된 후사크에 의해 사태가 수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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