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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가족화합(道理)/▷아버지역활(役割)

소몽 채기중

by 사니조아~ 2024. 7. 9.

  우리나라가 독립을 했으니 다행이지
독립이 안되서 아직 일본으로 부터 나라를 빼앗긴 상태를
감안하면 정말 갑갑하다.
 
우리 인천채가 28세 오른이신 채기중 독립운동가께서는 강직한
성격으로 일본 순경과 맞서 싸우며 나라를 되 찾기 위해서
노력을 하신 분이시다.
 
족보상에도 기록은 동일하게 나열되어 있다.
 
 
 
  蔡基中, 1873.7.7(음)~1921.7.9) 선생은 1873년 7월 7일(음) 경상북도 함창(咸昌)에서 채헌락(蔡獻洛)과 곡부공씨(曲阜孔氏) 사이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천이며, 자는 극오(極五), 호는 소몽(素夢)이다. 선생은 5척 4촌 정도의 키에 얼굴이 둥글고 검은 편이었으며, 눈이 컸다고 한다. 성품은 순박하고 민첩하며 구김살 없는 기질의 소유자였다. 선생이 태어난 함창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군이 주둔하였고, 이후 의병전쟁 때까지 전란이 거듭되던 곳이었다. 또한 일제의 침략이 주민들을 직접적으로 압박하던 고장이었다. 선생은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병참부대에 잡혀 큰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선생은 34세 되던 해인 1906년에 풍기로 이주하였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한 소년이었다고 한다. 남의 부당한 처사나 억울한 일을 보고는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근대식 교육을 받지는 못했으나,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배워 상당한 수준의 한문실력을 갖고 있었다. 또한 18세 때부터 한시에 심취하기도 했다. [소몽유고 素夢遺稿)]에는 선생이 지은 한시가 76수나 전해질 정도로 한시에도 조예가 깊었다.
 

선생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것은 풍기로 이주한 이후부터이다. 풍기는 [정감록 鄭鑑錄)]에 십승지지(十勝之地)로 알려진 곳으로 전국에서 많은 이주민이 모여들었던 곳이다. 이주민의 출입이 많아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지사들에게는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기에 좋은 장소였던 것이다. 선생은 1913년 풍기광복단을 조직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풍기광복단에는 선생을 비롯해 유창순(庾昌淳), 유장렬(柳璋烈), 한훈(韓焄), 강순필(姜順必), 김병열(金炳烈), 김상옥(金相玉), 정운홍(鄭雲洪), 정진화(鄭鎭華) 등 우국지사들이 가입하여 활동했다. 이들은 대부분 사회경제적으로 생활근거를 잃고 모여든 이주민 출신들이었으며, 의병적 기질의 인사들이었다. 선생은 풍기광복단을 조직하고 활동함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조직 과정은 양제안의 아들이 작성한 자료인 [양벽도공제안실기 梁碧濤公濟安實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한 달쯤 후 김봉초(金鳳樵), 정성산(鄭星山) 두 사람이 찾아와 손을 잡으며 “시국이 날로 어려워지는 이때에 풍기에 하늘을 찌를 만한 의기(義氣)를 지닌 지사(志士) 소몽(素夢) 채기중(蔡基中)이 생산작업에 구애받지 않고 모두 세 가구의 재산을 모아 비밀히 풍기에 혁명기관을 설치하고, 전국에 흩어진 의병무리의 장교와 모험적인 용사들을 은밀히 불러모아 바야흐로 대사(大事)를 도모할 계책을 세우고 있으니, 공이 마땅히 가서 논의하고 지휘함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선생은 의병에 참여한 후 전국에 흩어져 있는 인물들과 모험용사들을 모집해 광복단을 조직했다. 양제안은 풍기로 선생을 방문해 생사를 같이 하기로 결의하였다. 풍기광복단의 최대 문제는 군자금의 확보였으며, 이를 위해 일본인 광산이나 부호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선생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영월의 중석광에 잠입하여 활동하기도 했으며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했다.
 

선생은 1915년에 대한광복회 조직에 참여하였다. 대한광복회는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인사들과 풍기광복단이 연합해 조직한 비밀단체였다. 선생이 풍기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같은 뜻을 품고 활동하던 지사들이 있었는데 박상진(朴尙鎭), 우재룡(禹在龍), 이관구(李觀求), 양제안(梁濟安) 같은 이들이다. 이들은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기 이전부터 만주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추진했던 것이다.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에 세워진 대한광복단(풍기광복단) 기념비 사진. 채광식, [채기중 선생 전기], 소몽선생숭모회, 2001.

한일합방을 전후한 시기에 서간도를 중심으로 해외독립운동기지가 건설되었다. 해외 기지에서의 가장 중요한 사업은 국내에서 찾아오는 인재들을 바탕으로 독립군을 양성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국내에서 많은 이주민들이 건너갔다. 그러나 흉년과 풍토병으로 생계마저 위협받을 정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때문에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건설에는 국내의 지원이 필수적이었다. 당시 만주를 오가던 이들은 이곳의 절박한 실정을 목격하고 지원할 계획을 수립했다. 또한 군자금을 모집하고 군대를 양성해 독립을 달성한다는 목적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한 단체가 바로 대한광복회였다.

한말 국권회복운동의 큰 흐름은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조국독립이라는 역사적 과제 앞에서 이념과 투쟁 방략이 따로 있을 수 없었다. 때문에 공화주의 이념과 의병전쟁의 투쟁 방략을 서로 수용해 통일된 형태의 운동노선이 추구되었다. 대한광복회는 이러한 성격의 대표적인 국내독립운동단체였다. 풍기광복단이 의병적 기질을 가진 인사들이 중심이 된 단체라면,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한 조선국권회복단은 계몽운동 계열의 인사들이 중심이 된 단체였다. 박상진을 비롯해 혁명적 기질을 가진 조선국권회복단의 인사들과 풍기광복단이 연합해 조직한 것이 대한광복회였다. 선생과 박상진과의 만남은 양제안의 소개에 의해 이루어졌다. 양제안은 만주와 국내를 오가며 풍기광복단의 지도부와 박상진과의 만남을 주선하였다. 양제안이 이러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던 요인은 그의 의병 경력 때문이었다. 양제안은 허위와 함께 산남의진에서 활동했고 허위의 제자인 박상진을 만주에서 만났던 것이다. 박상진은 양제안의 소개로 선생을 방문해 동지적 결합을 했다.

대한광복회는 군자금 모집ㆍ혁명기지 건설ㆍ친일부호 처단ㆍ무기구입ㆍ독립군양성 등을 목적으로 한 국내혁명단체였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혁명기지를 건설하고 적당한 시기에 독립전쟁을 벌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투쟁 방략을 가졌다. 대한광복회는 비밀․폭동․암살․명령 등 4대 행동강령을 채택하고 활동을 전개했다. 대한광복회의 투쟁강령에는 이러한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① 부호의 의연금 및 일인(日人)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여 무장을 준비한다.

② 남북만주에 군관학교를 설치하여 독립전사를 양성한다.

③ 종래의 의병 및 해산군인과 만주 이주민을 소집하여 훈련한다.

④ 중국 등 여러 나라에 의뢰하여 무기를 구입한다.

⑤ 본회의 군사행동, 집회, 왕래 등 모든 연락기관의 본부를 상덕태상회(대구)에 두고, 한만(韓滿) 요지와
    북경·상해 등에 지점 또는 여관·광무소(鑛務所) 등을 두어 연락기관으로 한다.

⑥ 일인(日人)고관 및 한인 반역자를 수시(隨時)·수처(隨處)에서 처단하는 행형부(行刑部)를 둔다.

⑦ 무력이 완비되는 대로 일인(日人) 섬멸전을 단행하여 최후 목적을 달성한다.

 

 

대한광복회는 이와 같은 투쟁강령들을 실천하며, 국내에서 조직을 갖추는 동시에 만주에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만주 길림에 우재룡을 파견했고, 주진수(朱鎭洙), 손일민(孫一民) 등과 광복회를 조직해 만주거점의 본부로 삼았다. 또한 이진룡을 부사령으로 임명하여 만주에 상주시켰다. 이진룡이 순국한 후에는 김좌진을 부사령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전국 각도에 지부를 설치하고 군자금 모집과 의협 투쟁을 전개했다. 이를 위해 상업조직으로 위장한 거점들을 설치했다. 대한광복회는 한만요지(韓滿要地)와 북경·상해 등에 지점 또는 여관 광무소 등을 두어 연락기관으로 한다는 강령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거점들은 곡물상이나 잡화점으로 위장한 상업조직이었는데 국내에서는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와 영주의 대동상점(大同商店)을 비롯해 대구, 영주, 삼척, 광주, 예산, 연기, 인천 등에 설치되었다. 이밖에도 만주에는 안동여관(安東旅館), 삼달양행(三達洋行), 상원양행(尙元洋行) 등이 설치되고 운영되었다. 특히 영주의 대동상점과 대구의 상덕태상회는 대한광복회 활동에 있어서 중요한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또한 만주의 안동여관 역시 대한광복회원들이 만주에서 활동할 당시 크게 활용되었다.

 

대한광복회는 전국에 지부를 설치하면서 전국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지부는 경상도, 충청도, 황해도, 전라도 등을 중심으로 조직되고 활동하였다. 선생은 당시 경상도지부의 책임을 맡고 경상도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대한광복회의 회원 모집과 군자금 수집활동에 전념했다. 또한 끊임없이 회원을 모집해 대한광복회가 전국적인 조직으로 발전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풍기광복단원으로서 대한광복회에 가입해 활동한 인물들은 선생과의 인연 때문에 참여한 것이다. 또한 대한광복회는 각도 지부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 발전했는데, 그 중 충청도지부와 전라도 지부에서의 군자금 모집과 의협투쟁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충청도지부장인 김한종(金漢鍾)과 전라도지부장인 이병호(李秉昊)를 만나 대한광복회에 가입시켰던 것 또한 선생이었다.

 

경북 함창(咸昌:현재 尙州郡) 사람이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그는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유창순(庾昌淳)·유장열(柳璋烈)·한훈(韓焄)·강순필(姜順必)·김병열(金炳烈)·정만교(鄭萬敎)·김상오(金相五)·정운홍(鄭雲洪)·정진화(鄭鎭華) 등과 함께 1913년 풍기에서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을 결성하였다. 이때 광복단에 참여한 인사들은 대부분 의병적(義兵的) 성향의 인물들이었고 동단의 실천방략은 독립군의 양성을 위한 무기구입과 군자금 모집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강병수(姜秉洙)와 함께 영월(寧越)의 일본인 중석광(重石鑛)에 광부를 가장하고 잠입하여 자금탈취를 기도하였으며 또 자산가를 대상으로 군자금 수합활동을 펴고 국내뿐 아니라 만주를 왕래하며 재만(在滿) 독립군과도 연계하여 독립투쟁을 전개했는데, 이무렵 박상진(朴尙鎭)을 만나 보다 적극적인 투쟁방법을 모색하였다. 즉 절박한 민족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지금까지 행하였던 일본인광산 습격 및 순리로 요구하던 군자금 모집의 방법을 떠나 식민지배에 안주하는 친일부호의 응징과 무력적 방법에 의한 군자금 수합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이의 실천을 위해 풍기광복단 박상진이 참여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에서 정운일(鄭雲馹) 등 의병적 성향의 인사가 합류하여 1925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하였다. 이때 채기중은 광복회 조직의 경상도 지역 책임자로 활약하면서 광복회의 포고문을 작성하는 한편 동지를 규합하여 조직확대에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 1916년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이 무기구입을 위해 만주로 다녀오다가 일경에 피체되었고, 1917년초 김좌진(金左鎭) 등 광복회의 중진 인사들 다수가 망명함에 따라 동회가 수난을 당할 때, 그는 예산(禮山)의 김한종(金漢鍾)을 가입시켜 충청도의 조직을 재건케 하는 등 세력만회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민족적 각성을 위해 식민지배에 안주하는 친일부호를 처단할 때에도 앞장서서 1917년 11월 칠곡군(漆谷郡)의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기에 앞서 장승원의 집을 정찰하는 한편 거사를 지휘하여 성공케 하였다. 이일로 인하여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상해로 망명을 계획하던 중 1918년 피체되었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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