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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맥(人脈)/▶선,후배(寬)

故 신영복선생

by 사니조아~ 2024. 7. 20.
P>일시 : 2016.1.15

제목 : 새상을 75세에 떠나다.

 

늘 존경하신 분이시고

글쓰기를 잘 하시고 배우신 분이신데

오늘 세상을 떠나가 되어 무척 슬프다.

 

그 참 세상살이가 공짜가 없다는 말이 생각난다.

그 나마 배우고 익히니 글 속에 주제를 잘 파악하고

쉼 없이 글을 보고 읽으니 글을 쓸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

 

 

신영복 선생을 자주 만난다. 물론 직접 뵙는 것은 아니다. 사실 신영복 선생과는 일면식도 없다.

그럼에도 자주 '만난다'고 하는 것은 '처음처럼' 때문이다.

 

그사람의 말과 글은 곧 그 사람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소주 '처음처럼'은 신영복 선생의 글씨다.

 '처음처럼'을 자주 만나기에 신영복 선생을 자주 만난다고 한 것이다. 기자의 '처음처럼' 사랑은 꽤  오래됐다.

 

 

 

 

처음처럼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 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2007년에 출간된 신영복 선생의 서화집 '처음처럼'에서 신영복 선생은 삶의 의미를,
'처음처럼'의 의미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 가는 끊임없는 시작이다.

 

신영복 이라는 이름 석자를 세상에 알린 것은 1988년에 출간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신영복 선생은 서울대 경제학과와 대학원을 나왔다. 육군 중위 신분으로

육사에서 경제학과 교관을 하던 신영복 선생은 1968년 통일혁명당(통혁당)이라는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1심에서 사형, 2심에서도 사형을 선고 받은 뒤 우여곡절 끝에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확정받고 풀려날 기약 없는 수형생활을 시작한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야 통혁당 이라는 단체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는 신영복 선생은 갖은 고문과

구타 끝에 '통혁당 핵심 성원'이 됐고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온 28살의 전도유망했던 '교수' 신영복은

 이름이 아닌 죄수 번호로 불리는 '수감자'가 되어 세상과 격리된다.

 

 

억울함과 비관을 견디지 못해 감옥에서 숱한 재소자가 자살을 택했지만 신영복 선생은 '반듯하게'

살기로 한다.  한달에 딱 한번 주어지는 엽서 작성 시간이 신영복 재소자가 세상과 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자 시간이었다. 

 

한달을 기다려 머리 속에서 다듬고 다듬은 문장들을 가족들에게 보낸다. 이렇게 보낸 글들이 묶여져

나온 책이 바로 1988년 출판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이다.

엽서와 관련해 신영복 선생은 지난해 펴낸 '담론'에서 "신문지 크기 만한 햇볕을 무릎에 받고 있을

 때의 따스함이 좋아 자살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며 가족들이 편지의 최종 독자였기 때문에 반듯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최소한의 의무였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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